장애학의 개관
본문
이번 호부터 장애학연구회의 글이 연재된다. 한국장애학연구회는 장애학을 연구하고 우리나라에 소개하고자, 장애학을 가르치는 외국의 대학원에서 공부했거나 한국에서 장애학을 주제로 글을 써온 사람들에 의해 2009년 10월 10일에 창설된 모임이다. 그동안 연구회는 한일 학술세미나를 공동 개최하고 한일 장애학 심포지엄에 초청되는 등 장애학과 관련하여 끊임없이 국제교류를 해왔으며, 2013년 10월에는 7명의 집필진으로 ‘한국에서 장애학 하기’라는 책을 출판했다.
장애학은 요즈음 한국에서도 많이 회자되고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장애학에 관하여 아직 많은 것들이 정리되지 못하고 혼동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것은 장애와 관련해 장애학을 한국에 적용하기에 앞서 정작 장애학이란 무엇인가에 관해 정리한 문헌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발생한 현상이기도 하다. 물론 한국에도 외국 장애학 책의 번역서가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이 책들도 장애학 자체에 관해 다양한 측면에서 다루고 있지는 않다. 이에 ‘함께걸음’에서 한국장애학연구회 회원들로 하여금 장애학에 관해서 시리즈로 기고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키로 한 것은 참으로 뜻 깊은 시도이며, 연구회 회원들로서도 감사한 일이다. 그럼 먼저 본 첫 번째 기고에서는 장애학에 대한 개괄적인 정리와 소개를 해 보도록 하겠다.
왜 장애학이 필요한가
장애학이 필요한 이유는 어엿한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장애인이 기능을 하든 못하든, 치료하고 재활시키고 서비스를 제공하고 교육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장애인의 눈으로, 그저 존재하는 다양함의 일종으로 장애를 바라볼 수 있는 새로운 이론과 모델과 패러다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장애학이 가지고 있는 기본 철학이다. 장애학은 의료적 곤경 내에서만 위치해 있는 장애인을 그곳으로부터 이동시키고자 학문적으로 노력한다.
장애학의 발전
장애학의 발전은 장애인 권리 운동의 발전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지난 3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미국과 영국 모두 장애학이 장애인 권리 운동과 손을 맞잡고 발전해 왔다. 다시 말해, 장애학은 장애를 특별히 시민권 혹은 공민권의 지평 위에 올려놓기 위한 학계와 활동가들의 일종의 협력의 산물인 것이다. 그 후, 한때 의료 전문가와 사회사업가들의 작은 영역이었던 장애학이 지난 20여 년 동안 북아메리카와 영국을 비롯하여 인도, 독일, 프랑스, 일본 등 전 세계적으로 두드러지게 발전하게 되었다. 이제 미국의 경우에 장애에 관한 이슈는 사회사업대학에서도 사회사업 전공 학자에게서도 별로 다루어지지 않고 있으며, 이미 그들의 손을 떠나 별개의 영역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느낌이다. 아직도 한국에서는 장애인 문제라 하면 사회복지나 특수교육, 재활과학에서 다루어지고 있으나, 머지않아 장애에 관한 모든 문제를 다루는 하나의 독립적인 영역이 발전할 것이다.
장애학이란 무엇인가
장애학이란 과연 무엇이라 말할 수 있는가? 정의하기 쉽지는 않지만 ‘장애를 개인의 결함으로 보지 않고 오히려 장애를 규정하는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요인 등을 탐구하며 장애인에 의한 적극적 참여를 중시하는 다학제적 학문’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정의에 바탕을 두고 원칙적으로 장애학에서는 사회적・문화적・역사적 맥락 내에서 장애를 분석하고 다학제적 접근과 참여적・해방적 접근을 하며 장애인과 학계・전문직이 통합・융화한다. 이에 다음 장에서는 장애학의 정의에 담겨 있는 이러한 원칙들에 대하여 논해보고자 한다.
장애학의 원칙
첫째, 사회적・문화적 맥락 내에서 장애를 분석하기 위해 장애학은 장애에 관한 전통적인 의료적 모델을 넘어선, 진보적인 연구・개입 패러다임을 채택하고, 개인과 환경 사이에서의 복잡한 상호작용으로서 장애 경험을 연구한다. 또한, 장애학은 장애인의 광범위한 시민권을 증진시키기 위한 사회정책을 개발하고, 문학과 영화 등에서 그리고 세상에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장애를 둘러싼 사회적 통념(미신)・고정관념・미에 대한 가치관 등에 주목한다.
둘째, 역사적 맥락 내에서 장애를 분석하기 위해서 장애학은 역사 속에서 장애가 어떻게 다루어졌는가를 연구한다. 세계사 속에는 장애인의 분리・시설화, 장애인에 대한 불임 시술, 우생학・유전학, 히틀러 치하 독일에서의 장애인 안락사, IQ 테스트, 자선 사업 등 장애와 관련된 많은 슬픈 역사들이 있었다. 그러나 더욱 슬픈 것은 이러한 역사 중 몇몇이 아직도 한국에서는 현재진행형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장애학이 역사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이다.
셋째, 장애학은 여러 다른 학문 분야(문학, 예술, 사회학, 심리학 등)의 접근법과 통합된다. 물론 위의 원칙을 지키면서 접근해야 하며, 장애를 연구해왔던 전통적인 방법에 의해서는 안 될 것이다.
넷째, 장애학은 참여적 연구 접근법을 결합한다. 참여적 연구에는 시스템을 연구할 뿐 아니라, 바람직하다고 여겨지는 방향으로 시스템을 변화시키는 데 있어서 그 시스템 내의 구성원과 협력하는, 두 가지 목표가 있다. 그러므로 참여적 연구는 연구 과정의 한 중요한 측면으로 ‘서로 배움’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한 발 더 나아가서는 해방적 연구법이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연구 과정뿐만 아니라 연구를 수행하는데 필요한 자원에 대한 통제를 다루는데, 연구를 수행하는데 필요한 자원이란 연구 지원금뿐 아니라 연구의 내용・방법을 설정할 권한까지를 포함한다. 그렇다면 장애학에서는, 교육자나 연구자나 전문가가 장애가 있든 없든, 누가 장애학을 가르치거나 연구하거나 실천하는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가? 장애학에서는 당사자원칙과 장애학의 원칙들을 공유하는 누구로부터의 기여도 수용된다. 이에 장애학에서는 장애인과 학계・전문직이 통합・융화하며, 이것이 다섯 번째 원칙이다. 이는 네 번째 원칙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인데, 장애인이 학자와 전문직에 그리고 학자와 전문직이 장애인의 세계에 어우러진다는 말이다.
장애학의 접근법
대부분의 장애학 학자들은 인문학적 접근과 사회과학적 접근의 두 가지 기본적인 접근법 중 하나를 따른다. 먼저 인문학적 접근은 사회 내에서의 장애를, 종종 개인화된 관점에서 주목하며, 무엇이 장애인에 대한 고정관념과 억압을 만들게 되는지를 고찰한다. 학자들은 이러한 인문학적 접근과 과정을 통하여, 장애에 대하여 생각하는 새로운 방식들을 도출해낼 수 있게 된다. 또 다른 접근법은 사회과학적 접근법이다. 이러한 접근에서는, 장애를 하나의 사회 정치적 이슈로서 연구하고, 장애인 개인보다는 전체를 다루는 법률과 정책에 주목하는 것이다. 그러면 어떤 접근법이 한국에서 적절한가? 사회과학적 접근과 인문학적 접근이 모두 필요하다. 사실 지금 이들 두 접근법들은 장애학의 선진국에서는 아주 근접해져 있으며, 이들 관점들은 혼합되어 있다. 그래서 개개의 학자가 어떤 접근을 취하든, 장애학은 다양한 학문 영역과 주제를 결합하게 되는 것이다.
결론
장애학과 기타 장애 관련 학문은 서로 만날 수 있는 접점이 있다. 장애학은 장애 관련 학문들이 장애인들을 돕는데 어떻게 하면 효과적일 수 있는가 하는 시사점을 줄 수 있다. 장애인복지 제도 면에 있어서는 사실 모든 장애 정책은 장애인을 어떻게 보느냐 하는 나름대로의 가치 기준을 가지고 있기 마련인데, 장애학은 그 가치 기준에 주목한다. 이에 장애학에 의하여 자각된 장애인들은 제도의 기저를 이루는 가치・믿음・기대를 검토하고 이에 더욱더 장애 정책 형성과정에 참여할 것을 요구할 것이다. 이러한 장애학이 앞으로 한국의 장애계에서도 큰 역할을 하리라는 것은 거의 확실한 일이다. 이에 앞으로 위에서 언급한 장애학의 원칙과 접근법에 입각한 정말로 다양한 주제의 글들이 한국장애학연구회 회원들에 의해서 ‘함께걸음’에 기고될 때, 부디 많은 독자들께서 관심을 가져주시기를 부탁드린다.
※본 기고는 ‘조한진, 강민희, 정은, 조원일, 곽정란, 전지혜, 정희경 (2013). 한국에서 장애학 하기. 서울: 학지사.’에서 발췌하여 수정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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