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복지원 인권유린 사건의 진상 규명을 위한 특별법 제정이 필요하다 > 대학생 기자단


형제복지원 인권유린 사건의 진상 규명을 위한 특별법 제정이 필요하다

[여준민의 탈시설 이야기]형제복지원 사건 진상 규명을 위한 대책위원회 유엔 인권이사회 서면 진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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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복지원 사건 진상 규명을 위한 대책위원회 유엔 인권이사회 서면 진술서

1970년대 한국에는 ‘부랑인’이라는 개념이 있었다. 1950년 한국 전쟁 이후 급속한 자본주의 발전에 따라 산업화, 도시화 되면서 농촌에 살던 사람들이 일거리를 찾아 도시로 이주하게 되었다. 마땅한 일자리를 찾기 힘든 사람들은 가난한 삶을 이어갔고, 한국 정부는 복지시스템을 만들기도 전에 도시정비, 사회정화란 명목 하에 주거불안으로 거리를 떠도는 사람들을 ‘부랑인’이라고 규정했다. 이에 따라 한국 정부는 헌법과 국제인권선언이 천명한 ‘모든 인간은 존엄하고 자유로운 존재’임을 부정하며, 그들을 강제로 수용소에 감금하는 정책을 펼쳐나갔다. 그것이 바로 1975년에 제정된 [내무부훈령 410호]이다. 하지만 이 ‘부랑인’이란 개념은 매우 작위적이고 반인권적이며 반헌법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가난한 사람들의 ‘자립과 정신교육’을 목적으로 한다고 했지만, 신체의 자유를 구속하고 범죄자 취급하며 폭력과 성폭력, 살인, 의료방치, 인신매매 등을 자행해 참혹한 인권침해의 결과를 가져왔다. 그 예가 부산의 ‘형제복지원 인권침해 사건’이다.

당시 한국 정부는 경찰과 공무원 등으로 단속반을 설치하고 길에서 잠을 자거나 구걸을 하거나 주민등록증이 없거나 하는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잡아가 부산의 [형제복지원] 같은 ‘부랑인 수용소’에 죄 없는 사람들을 강제로 감금했다. 이 같은 ‘부랑인 수용소’는 전국 각지에서 운영되고 있었고 당시 한국 정부와 한국 사회는 이 같은 정책을 국가정책이라 여기며 당연시 했다. ‘자립’이란 미명 하에 벌어진 국가적 인신매매였지만 일반 시민들의 눈에 불안하고 위협적 존재로 보이는 사람들을 안 보이게 하는 것을 용인한 것이다.

이는 1986년 아시안게임,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더 가속화하는 정책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전두환 정권은 ‘사회정화’라는 국정 목표를 세우고 발전된 한국의 이미지를 세계에 ‘보여주기’ 위해 국민을 분리했다. 마치 독일 나치정권이 ‘우생학’과 ‘민족주의’를 명분으로 분리하고 차별하고 집단살인했던 것처럼. 전두환 정권은 1975년 박정희 정권의 ‘부랑인’ 개념을 이어가며 국민과 비국민으로 구분해, 그들을 ‘수용소’에 가두고 지역사회에서 보이지 않게 ‘처리’했다. 역사의 비극은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2012년 한국 국회 앞에서 생존자 한종선(38세) 씨가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1인 시위를 시작했다. 1984년 당시 그는 누나와 함께 수용되었고, 1년 후 아버지마저 수용되었다. 1987년 형제복지원 원장인 ‘박인근’ 씨가 정부 보조금 횡령, 수용인들의 강제노역 혐의 등으로 구속되면서, 수용되었던 3천여 명의 사람들 중 무연고자는 다른 시설(고아원, 정신요양시설 등)로, 연고자가 있는 사람들은 집으로 보내졌다. 그는 고아원에서 청소년기를 보냈고 가족의 행방은 알 수 없었다. 가족을 찾으려 했지만 한국 정부와 경찰은 “찾을 수 없다”고만 했는데, 2008년도 ‘기초생활수급권자’로 등록하기 위해 가족관계를 파악하던 중 극적으로 누나와 아버지의 행방을 알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그는 큰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의 누나와 아버지는 1987년부터 줄곧 ‘정신병원’에서 생활해야 하는 정신장애를 갖게 된 것이다. 이유는 군대식으로 운영되던 시스템 속에서 강자가 약자에게 행한 수많은 폭력과 성폭력, 강제노역, 단체기합 등 비인간적인 환경과 처우를 감당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형제복지원에서의 감금생활 때문에 배우지 못하고 사람을 신뢰하지 못하는 등 트라우마를 갖게 된 그는 ‘무엇이 자신의 삶과 가족의 삶을 무너지게 했는지...’ 생각했고, 그 결과 ‘형제복지원’이란 곳에서의 처참한 인권침해의 경험이란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무려 26년 만에 반인권적인 국가정책에 의한 ‘수용소 정책’의 생존자가 입을 열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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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3월 11일 국회 정론관에서 열린 형제복지원사건특별법 입법 청원 기자회견 모습. 이후 국회에 특별법이 발의됐지만 지난 6월, 상임위 배정이 보건복지부로 가게 되자 대책위는 법안을 철회하고 수정법안을 발의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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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시아인권위원회 바실 전 대표가 형제복지원에 관해 인터뷰하는 모습

이 사건은 1987년 1월 한 검사가 산 속에서 어떤 사람들의 감시에 의해 강제노역을 하고 있는 장면을 목격하고는 ‘이상하다’는 생각 끝에 은밀한(?) 수사로 시작되었다. 때마침 구타로 1명이 사망하고 35명이 집단탈출 하게 되는 상황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박인근 원장’은 2년 6개월의 형을 받았다. 정부보조금 횡령 등만 기소되었고 ‘특수감금죄’ 등은 해당되지 않았다. 한국의 사법부는 이를 ‘국가정책’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복지실현’이란 명분으로 ‘부랑인’이라 규정된 사람들을 강제 감금하고 관리감독하지 않은 그 모든 인권유린 상황을 인정한 것이다.

하지만 당시 야당이었던 신민당 조사보고서에 의하면, 1986년 전체 수용자 3천975명 중 경찰에 의해 수용된 숫자가 3천117명, 구청 공무원에 의해 잡혀온 사람이 253명으로 약 84.7%가 국가에 의해 신체적 자유를 침해당했다. 또한, 1975년부터 1986년까지 무려 12년 동안 513명이 사망했는데, 1986년 이 사건이 알려지게 된 구타사망의 당사자의 사망진단서에 ‘구타’가 아닌 ‘심부전증’이라고 기록되어 있어, 수많은 죽음의 사인에 대해 진실을 밝혀낼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특히 이는 최근 사망자 유가족의 증언에서도 드러났다. 그의 형은 청각장애인이었고 두 번이나 잡혀 들어갔는데, 두 번째 들어간 지 3일 만에 죽었다고 증언했다. 그의 시신은 온 몸이 ‘멍투성이’였다고 했다. 하지만 ‘사망자 명부’의 사인에는 ‘심부전증, 정신쇠약’이라고 적혀 있었다. 이에 대해 그의 아버지는 아들이 ‘형제복지원’에 끌려갔기 때문에 실종되었고 죽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정부가 하는 일에 어떻게 문제제기 하냐”며 사인을 밝히는 일을 포기했다고 했다. 부랑인 수용정책이 국가의 중대한 정책임을 알았던 것이다.

당시 검찰 수사과정에서 청와대, 부산시장, 내부부장관, 안기부 등 국가 권력은 담당 검사에게 수사중단을 지시했다. 온갖 고문으로 인권유린을 당한 피해자들에 대한 조사와 정부 관료들과의 유착관계 혹은 정부정책의 위법성 등에 대해서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반면, 시민들은 이 사건을 국가의 위탁을 받은 한 개인이 저지른 비리로 인식했다. 강제 수용이 가능했던 국가정책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문제의식을 느끼거나 문제제기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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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시아법률자원센터와 형제복지원사건진상규명을위한대책위원회가 유엔 인권이사회에 제출한 서면진술서 내용과 지난 6월 19일 회의장에서 아시아법률자원센터가 구두발언한 내용

26년 만에 힘겹게 살아남은 한 생존자로 인해 이 형제복지원 사건은 다시 한국 사회 이슈가 되었다. [살아남은 아이]란 책이 출판되었고, 21개의 시민・인권단체들이 모여 ‘진상 규명’을 촉구하는 활동도 진행하고 있다. 현재 약 200여 명의 생존자들이 용기를 내어 말하기 시작했고, 주체적으로 모임을 만들어 진상 규명과 명예회복, 국가책임을 요구하고 있다. 언론은 다양한 접근의 기획보도를 하고 있으며, 국회는 특별법을 발의했다. 하지만 여당과 박근혜 정권은 생존자들의 고통어린 목소리를 외면하며 진실이 무엇인지 밝히는 것을 반대하고 있다. 반대한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진상 규명을 위한 특별법 발의에 여당 의원은 단 한 사람도 참여하지 않았으며, 안전행정부가 국회에 이 법안을 논의할 수 있는 상임위를 ‘안전행정위’가 아닌 ‘보건복지위’로 가야한다는 의견서를 제출했다는 것이다. 이는 진상 규명을 하지 않고 피해자가 나타나면 그저 경제적인 지원 몇 푼 하겠다는, 또다시 사건의 의미를 축소, 진실을 왜곡하겠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 사건의 실체적 진실은 1975년 국가가 만든 [내무부훈령 410호]에 의해 국가 경찰과 공무원에 의해 가난하고 힘없는 시민의 신체적 자유를 억압당하고 죽임까지 당한 ‘국가범죄’, ‘국가폭력’이란 점이다. 생존자들과 인권시민사회단체들은 그 진상 규명을 요구하고 있다. 국가는 이를 위한 법 제정 등 책임을 다해야 할 의무가 있다. 만일 국가가 나서 법 제정을 통해 진실을 규명한다면, 당시 존재했던 다른 지역의 수용소의 인권유린도 함께 규명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올바른 과거 청산과 사죄로 한국 사회에서 상식이 되어 현재도 이어져오고 있는 ‘시설수용정책’을 지역사회 자립 정책으로 전환하는 계기를 만들 수 있다. 가난과 장애 등을 이유로 신체를 구속당하고, 집단생활과 관리체계의 이유를 들어 자기결정권을 행사하지 못하는 것은 심각한 인권침해다. 이는 시설을 운영하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 정부가 갖고 있는 시설수용 정책에서 기인하고 있다.

과거 군사정권이 급속한 경제성장 등으로 정당성을 부여받기 위해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벌인 수용소 정책은 명백한 국가에 의한 인권침해 사건이다. 30여 년이 지난 지금, 생존자들의 고통어린 외침에 경청하고 반성과 인정으로 인권을 회복해 가야 한다.

 

※편집자 주

이 글은 형제복지원사건 진상 규명을 위한 대책위원회와 아시아인권위원회가 형제복지원 사건과 관련, 유엔 인권이사회에 제출한 서면진술서다. 이 내용은 유엔 산하 각 나라에 보고되었고, 이로써 국제사회가 한국의 형제복지원 사건을 알게 됐으며, 한국 정부에 형제복지원 사건 진상 규명을 위한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고 있다.

작성자여준민 형제복지원사건진상규명을위한대책위원회 사무  aery727@cowalk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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