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어, 생각만큼 매력적이지 않습니다 > 소소한 사회통합 이야기


수어, 생각만큼 매력적이지 않습니다

소소한 사회통합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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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제지훈/사회복지사


 

사랑의 대화


해질녘 길을 걷다가 수화를 하고 있는
남자와 여자의 모습을 본 적이 있었습니다.
버스를 기다리며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노라니
그 눈빛, 그 몸짓, 그 손짓들이 무척이나
포근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중략)
만일 그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면
오랫동안 정말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 박성철 <사랑에 대한 177가지 사색> 중



스물셋
이루어질 수 없어 첫사랑이라 했던가. 그 모질고도 질긴 감정의 고리를 끊어내고자 한겨울에 무작정 달려간 곳이 청량리. 지금은 사라진 ‘588거리’의 불그스름한 홍등가를 지나 어둑한 굴다리를 건너면 마주하는 곳이 있었으니, 바로 노숙인들에게 식사를 제공하고 당시까지만 해도 무료병원 건립을 준비 중이던 한 공동체. 상한 음식을 예쁜 포장지에 싼들 썩어 진동하는 냄새를 어찌할까마는, 상해 문드러진 마음이라도 박애주의라는 멋진 포장지로 억만 겹이라도 둘러싸 그럴싸하게 보이고 싶었습니다.
스물셋 청춘의 몸부림이었지요. 그곳에서 처음 접하게 된 책이 바로 박성철 작가의 <사랑에 대한 177가지 사색>이었습니다. 그중 사랑의 대화는 당시 저의 상황과 묘하게 겹쳐, 첫사랑 그녀와 오랫동안 정말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바람을 갖게 해주었습니다. 아마 그때 처음으로 수어가 참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서른하나. 수어를 배우다
첫사랑은 그렇게 물 건너갔고. 수년 전 그곳에서의 삶이 인연이 되어 저는 사회복지사로서의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사회복지사로서 저의 지론은, 사회복지사는 ‘만능 엔터테이너’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언제 어느 상황과 맞닥뜨리더라도 우습게 넘길 수 있을 만큼의 지성과 인성과 실력을 겸비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사회복지사의 제1의 덕목이라 생각했지요. 문무를 겸비한 사회복지사가 되기 위해, 끊임없이 저를 업그레이드시켰습니다. 사진, 컴퓨터프로그래밍, 웹디자인, 컴퓨터 수리 및 조립, 목공, 인테리어 기술, 커피 등등. 물론 ‘수어’도 그중 하나입니다. 장애인복지 분야에서 근무하는데 기본적인 수어 정도는 알아야겠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그 옛날 수어에 대한 아련한 추억도 한 몫 하였습니다.
지문자, 지숫자, 얼굴표정, 단어 등 수어의 기본을 배우는 데 3개월, 간단한 인사와 문장을 연습하는 데 3개월. 그렇게 농인들을 만나면 제 소개 정도는 간단하게나마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던 6개월의 시간을 보낸 뒤 고급과정 수강신청을 앞두고 있던 어느 날. 충격적인 사건 하나가 발생하였습니다. 농아인협회에 볼일이 있어 잠시 들렀는데, 마침 예닐곱 정도의 농인들이 모여 담소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평소 붙임성이 좋았던 터라, 짧은 시간에 많은 농인들과 안면을 트고 스스럼없이 지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느 날처럼 반갑게 인사하고 서로 안부를 묻고는, 곧 자기들끼리 뭔가 진지한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이럴 수가. 너무 빠른 손놀림에 도무지 무슨 이야긴지 알아먹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뭐지? 여태껏 내가 알고 있던 수어가 아닌데? 이제 막 수어를 배우고 자신감에 쩔어 있던 나를 어여삐 여기사 이 사람들이 날 갖고 논 건가? 아…, 얼마나 내가 같잖아 보였을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자괴감은 결국 고급반을 포기하고 농인들의 세계로 뛰어들게 만들었습니다. 그 당시 거제에 거주하는 농인들의 8할은 풀빵을 구워 생계를 유지하였습니다. 좋은 먹잇감을 찾은 것이지요.
그날부터 죽기 살기로 풀빵 파는 농인들을 찾아다녔습니다. 장사 시작부터 마칠 때까지 죽치고 앉아서, 어떻게든 이들의 수어를 배우고 싶었습니다. 표정, 농식표현, 관용어 등등. 배운 것을 잊지 않으려고 집에 와서 거울을 보며 부단히 연습하고 또 연습했습니다. 농인들의 생업에 지장을 주면 안 되니까, 입에서 풀내가 나도록 풀빵도 사 먹었습니다. 느끼한 밀가루 반죽에 달달한 앙꼬를 하루 종일 먹는다고 생각해 보세요. 입에선 밀가루 냄새가 풀풀 나고, 속은 니글니글. 아, 변에서도 단내가 날 지경이었습니다.
그렇게 길거리에서 스트리트 수어를 배운 지 1년. 저를 바라보는 농인들의 시선에 3단계의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저러다 말겠지?’, ‘뭐 저런 게 다 있노?’, ‘장난이 아닌데?’ 진심이 통하고 나니까 비로소 농인들이 마음을 열기 시작했습니다. 집안 문제, 자녀 문제, 돈 문제, 자살 문제, 사기당한 이야기 등등. 수어통역센터에 근무하는 통역사 못지않게 그날부터 밤낮없이 통역하러 다녔습니다. 아니, 통역사는 퇴근 이후는 휴무인 관계로, 한밤이나 새벽 통역은 제 몫이었습니다. 참말인지 거짓말인지 아직도 헷갈리지만, 농인들은 제 수어가 제일 쉽고 입만 다물면 농인이라 착각할 정도로 표정이 완벽하답니다. 하하하!


제가 수어를 좀… 합니다 ^^
경찰서와 법원을 참 많이 다녔습니다. 쪼매 똑똑한 농인들이 쪼매 착해 보이는 농인들을 꼬드겨, 고리(高利)의 이자를 준다고 돈을 빌리고선 쌩∼깐 사건. 명의를 빌려 분양하는 아파트에 당첨시켜 놓고는, 몰래 전매해 수익을 가로챈 사건. 교회까지 찾아와 예배 중에 폭력을 휘두른 사건. 사채업자에게 빌린 돈을 갚을 수 없어 돌려막기로 버티다,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자 콱 죽어 버리겠다고 엄포를 놓은 사건. 이뿐이 아닙니다. 이사 갈 집이 없다고 집을 구해 달래서 구해주고, 직장이 없다고 직장 구해 달래서 취업시켜주고, 이런저런 수습하기 힘든 사고로 생활고에 시달린다 해서 매월 정기후원 받아주고.
2주 전에는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대학생 딸을 둔 농인부부가 감정의 골이 깊어진 채 수년을 그냥 버티며 살아오다 터질 게 터져버렸습니다. 청인인 딸은 걱정이 되면서도 상황을 직감한 듯, 두 분의 의사를 존중한다고 말을 하고는 말을 잇지 못합니다. 좀 만나서 수습이든 뭐든 해 달라는 요청에, 밥 사주면 만난다고 반(半)협박을 하고는 기어이 밥을 얻어먹었습니다.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는 자리에서도 워낙 너스레를 잘 떠는 제 성격에, 일단 경직되지 않은 분위기에서 식사를 잘 마쳤습니다. 이제 이야기를 좀 하자는 말에 시원한 커피 한 잔 사주면 하지…, 참 사악하지요? 결국 카페로 이동. 그냥 한 시간 남짓 두 사람을 신나게 웃겨주고 나왔습니다. 둘이서 신나게 웃다가 서로 눈이 마주치면 머쓱해지고, 그러길 반복하다 보니 그냥 분위기는 자연스러워졌지요. 그렇게 헤어졌습니다. 다음 날, 남편에게서 영상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오해의 골이 깊은데 본인의 이야기엔 말문을 닫아 버리니 이야기 좀 잘 해 달라고.
수년간 쌓인 감정의 골이 어찌 한순간에 풀리겠습니까만, 격한 감정들이 잠시 휴지기에 접어들고 서로가 조금씩 양보하기로 했으니 일단은 지켜볼 일입니다. 다음에 또 대화가 필요하면 지난번엔 생선(찜)을 먹었으니, 다음번엔 소나 돼지를 사주면 만나 줄 의사가 있다고 엄포를 놓았습니다.
또 다른 인연 하나. 열심히 일하고 있는데, 꼭 본인 쉴 때만 불쑥 찾아오는 노총각이 있습니다. 용접 관련 피복공장에서 수년째 일하고 있는데, 사실 그곳을 제가 소개해 주었습니다. “오늘 너 어디요?” 이러고 문자가 오면 “일하는 중. 바빠요” 이렇게 답장을 보냅니다. 우리 같으면 당장 눈치를 채고 안 오겠지요? 그런데 옵니다. 그것도 불∼쑥. 온다 간다 말도 없습니다. 열심히 일하다 뒤돌아보면, 바로 뒤에 서서 씩 웃고 있습니다. 소∼오름.
수어로 막 뭐라 합니다
“온다 간다 말 좀 하고 오소!”
그냥 씩 웃습니다.
“아…, 진짜 바쁜데 저기 앉아서 좀 기다리소.”
이번엔 이빨을 드러내고 더 크게 씩 웃습니다. 이만하면 뚜껑이 열리겠지요? 눈알을 부라리며 막 뭐라고 하려는 찰나, 책상 위에 던져놓은 복숭아 한 상자를 가리킵니다. 할인판매를 하길래 마트에서 사 왔으니 집에서 먹으랍니다. 수어로 답합니다.
“아니? 뭘 이런 걸 다? 들고 온다고 무거웠지요? 이런 거는 온다 간다 말하지 말고 그냥 갖고 오세욧!!!”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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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는 언어일 뿐, 중요한 건 ‘사람’입니다
수어가 참 아름다울 거라 생각했었습니다. 말하지 않고 손짓과 표정으로 서로의 감정과 사랑, 애틋함을 표현할 것이란 낭만적인 생각에 사로잡혀서 말이죠. 그런데 이 세계에 발을 들여놓고 보니, ‘수어’라는 게 생각만큼 그리 매력적이지가 않습니다. 모르는 사람이야 손으로 표정으로 대화하니 정말 멋져 보일 수 있겠지요. 저도 그랬으니까요.
다시 한번 분명하게 말하지만, 절대로 수어는 매력적이지 않습니다. 세종대왕이 창제하신 국어가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이고 독창적인 언어이긴 하지만, 우리는 일상에서 그것이 정말 아름답고 매력적이라 느끼고 살지는 않습니다. 바로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 때문입니다.
쓰는 사람에 따라 고운 말, 아름답고 예쁜 말이 되기도 하고, 사람을 절망에 빠뜨리거나 죽음에 이르게도 하는 무서운 말이 되기도 합니다. 국어는 우리의 희로애락을 표현해주는 감정의 전달자요,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어주는 가교입니다. 그러니 아름다워도 사람이 아름답고, 매력적이어도 사람이 매력적인 것이지요.
국어와 마찬가지로 ‘수어’도 이제 우리의 공식 언어가 되었습니다. 수어가 정말 생각만큼 매력적일까요? 경험상 그렇진 않습니다. 그것은 단지 농인 삶의 희로애락과 농인과 농인, 농인과 청인의 삶을 이어주는 가교입니다. 농인의 삶도 청인의 삶과 동일합니다. 사람 사는 세상이 농인이라 해서 다르겠습니까? 아름다워도 농인이 아름답고, 매력적이어도 농인이 매력적인 것이지요. 수어는… 수어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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