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어민보다 더 원어민 같을 수 있을까요? > 지난 칼럼


원어민보다 더 원어민 같을 수 있을까요?

소소한 사회통합 이야기

본문

 
수년 전 인천의 한 교회 농인부에서 거제를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대표 간사님과 스텝, 농인 몇 분이 팀을 이뤄 먼 길을 달려 오셨는데요. 간간이 교류가 있어도 쉽게 다가갈 수 없는 거리라 온라인으로만 소식을 주고받았는데, 그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달려 오셨으니 얼마나 반가웠겠습니까? 숙식은 기본이고 해 드릴 수 있는 최고의 서비스로 지극히 모셨습니다. 특수한 목적을 가지고 전국을 일주하던 터라 오래 붙들진 못하고 바로 다음 날 떠나보내야 했는데요. 보내는 사람, 떠나는 사람 모두가 아쉬워 다음을 기약하고 또 기약하고 그랬더랬지요. 비대면이 일상이 되어버린 요즘, 그 때의 추억들이 너무 그립습니다. 
 
 
사실 그 즈음 저는 교회 안에서 농인부를 만들어 막 운영을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거제엔 당시만 해도 젊은 농인들은 물론이고 수어를 제대로 사용하는 농인들이 많지 않았습니다. 어쭙잖게 수어를 배워 막 농인부를 시작했으니 얼마나 답답하고 막히는 게 많았겠습니까? 그 찰나에 먼저 농인부를 시작해 운영하고 있는 교회에서 친히 방문하셨으니 이건 뭐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 아니었겠습니까? 그 밤을 까맣게 불태우며 담당 간사님과 농인들을 붙잡고 농인부 운영의 노하우와 부족한 수어를 배우기에 혈안이 되어있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었겠지요. 졸음과 피곤을 잊은 채 말이지요.
 
 
짧은 만남이었음에도 불과 이틀 전보다 훨씬 업그레이드된 저 자신을 발견하고 느꼈던 그 희열감. 진짜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습니다. 배움에 대한 갈급함이 극에 달했음에도 여전히 주위엔 그 욕구를 채워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때 문득 떠오른 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인천에서 다녀간 젊은 농인 자매였습니다. 뭐, 그땐 저도 싱글이었고 교제하는 사람도 없었으니 당연히 이성에게 눈이 갔겠지요? 특히 농인들과 통화할 땐 반드시 영상으로 해야 하니 그 핑계로 얼굴 한 번 보고. 캬~ 얼마나 두근거렸겠습니까?
 
 
미치도록 뛰는 심장에게 주의를 주고 몇 가지 궁금했던 수어단어와 관용표현들을 핑계 삼아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뭐지? 칼럼의 주제가 이게 아닌데 산으로 가고 있는 느낌은? ㅋㅋ) 따르릉~ 따르릉~ 쿵쾅! 쿵쾅! 뭐시여? 왜 벨소리에 심장소리가 싱크(동기화) 되지? 아~ 진짜! 어서 받아요. 이러다 심장 터지겠어요. 드디어 까맣던 화면이 밝아지더니 이내 상대방의 얼굴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오~ 마이~ 갓~~~! 
 
어쩌지? 어쩌지? 뭔 말부터 하지? 미친 듯 얼굴은 뻘게지고 심장은 금방이라도 몸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고. 여러분, 그거 아십니까? 말과 같이 수어도 더듬거린다는 거. 말이랑 수어랑 똑같습니다. 당황하면 막히고 더듬거리고. 오메~ 얼마나 더듬거리고서야 겨우 진정을 했든지. 영문도 모르는 그녀는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웬 청춘의 뻘짓에 얼마나 당황했을까요? ㅋㅋ
 
 
흥분이 채 가시기도 전에 부끄러움을 만회해 보려고 알고 있는 수어단어를 총동원해 안부 인사부터 밥은 먹었는지, 일하는 건 좀 어떤지 굳이 묻지 않아도 될 것들을 시시콜콜 물어봅니다. 이제 막 수어를 배운 사람이 원어민 앞에서 (긴장을 감추려) 거드름을 피우며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그녀의 기분은 어땠을까요? 지금 생각해도 (부끄러워서) 얼굴이 후끈 달아오릅니다. 그래도 자신들의 언어를 배우려고 애쓰는 모습이 측은했는지 친절하게도 하나씩 짚어가며 설명해 주었습니다. 단어는 물론이고 그 단어의 어원과 예시, 관용적인 표현까지 수어 입문자인 제게 원어민인 그녀의 친절한 가르침은 또 다시 저를 업그레이드 시켜주기에 충분했습니다.
 
 
대화는 점점 무르익고 일상적인 수어가 아닌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다양한 영역의 다소 전문적인 단어들로 주제가 옮겨갈 때 즈음 그녀가 한 가지 제안을 합니다.
 
 
“사실 전문수어는 저보다 대표 간사님이 훨씬 잘하십니다.” “네? 그분은 청인이시잖아요. 어떻게 청인이 농인보다 수어를 더 잘 할 수가 있지요?”
“청인인데 농인보다 수어를 더 잘해요. 우리도 모르는 거 있음 그분께 물어봐요”
 
 
사실 충격이었습니다. 날 때부터 영어를 사용한 미국사람이 한국에서 영어를 배운 한국 사람에 대해 ‘저 사람이 우리보다 영어 더 잘해요’라고 하는 느낌? 한국말 배운 외국 사람이 한국 말 쓰는 것 보면 억양이나 어순, 존댓말, 단어선택 등이 어색해 대충 들어도 티가 나지 않습니까? 언어라는 게 단순히 말을 빨리 한다고 해서 결코 잘한다고 하지는 않습니다. 정확한 어법과 억양, 원어민들이 들어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의 언어구사력과 현지 문화에 대한 이해 등이 동반되었을 때 비로소 잘! 한다는 소릴 들을 수 있을 겁니다. 그렇다 쳐도 ‘미국인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한국인’이란 주제는 다소 억지가 있어 보이지만요.
 
 
수어를 언어로 사용하는 원어민인 농인들에게 수어를 가르치는 청인은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아니, 도대체 그것이 가능이나 할까? 궁금해서 다시 물어봅니다.
 
 
“아니 그게 가능해요? 다른 농인들이 봐도 정말 그분이 농인보다 더 수어를 잘한다고 생각해요?”
 
“네, 가끔 모르는 농인들이 그분과 대화하다가 전화 통화하는 거 보고는 깜짝 놀랄 때가 있어요. 청인이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다면서요.”
 
 
그때부터 저의 방황은 시작되었습니다. 농인보다 더 농인을 잘 이해하는 사람, 장애인보다 더 장애인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 이런 사람이 되려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물음이 늘 떠나지 않았습니다. 여태껏 뚜렷하게 그 해답을 찾지도 못했습니다만, 그래도 적어도 답을 찾아가는 과정에 있는 구도자의 삶은 살아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아~ 참, 그 자매는 지금쯤 결혼해서 행복하게 잘 살고 있겠지요? 언젠가 만나면 진짜 고마웠다고 전해 주고 싶은데 통 소식을 알 수 없네요. 이 지면을 빌어 고마움을 전합니다. ^^ 
 
작성자글. 제지훈/사회복지사  cowalk100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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