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어나, 일어나, 봄의 새싹들처럼... > 대학생 기자단


일어나, 일어나, 봄의 새싹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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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증장애우들에게 있어 캠프라는 단어만큼 낯선 말도 없을 것이다. 대개의 장애우들은 장거리 여행은커녕 가까운 곳의 외출도 그리 쉽지 않다. 그래서, 수십년간 바깥 구경도 못하고 사는 장애우를 쉽게 볼 수 있다. 이들에게는 다만 집 근처라도 산책을 해보는 것이 소망이다. 더군다나 바다를 갈수 있다는 사실은 흥분 그 자체이다. 오죽하면 이정률씨가 자신의 사진전에 "바다가 보고싶은 사람들"이라는 이름을 붙였겠는가.

잔디회(근육디스트로피 협회)는 올 여름 바다로 갔다. 전라북도 격포에서 8월 10일에서 12일까지 2박 3일동안 여름캠프가 열렸다. 잔디회 여름캠프는 올해 10년째를 맞는 역사 깊은 캠프로서 잔디회 음악회와 함께 가장 큰 연중행사이다.

8월 10일 오전 잔디네 집 도로 앞에는 자원봉사자들이 쉴 틈도 없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번 캠프의 주인공인 잔디회 회원(근육디스트로피 장애우)들도 하나 둘 도착했다. 잔디회 회원 65명에 자원봉사자와 잔디회 임원, 회원 가족들을 포함해 무려 168명 이란 대규모의 인원이 이번 캠프에 참가했다. 환우들 중에는 증세가 심한 회원들도 있어 출발부터 세심한 주의가 요구됐다. 회원들을 버스에 태우는 일 말고도 자원활동자들이 할 일들이 많다. 여름캠프의 자원봉사자의 구성은 기존 잔디회 자원봉사회원(현재 100여명)이 주축을 이루고 이외에 회원과 임원 가족, 그리스도 교회, 장애우 대학 동문, 통신모임(컴퓨터 선교회, 나누리), 그밖에 방송 등 여러 매체를 통해 찾아온 사람 등 다양한 구성으로 이루어졌다. 대부분 귀중한 여름휴가를 잔디회 캠프에 맞춰 찾아온 사람들이다.

10시 40분 두 대의 고속버스가 격포를 향해 출발했다. 출발한지 5시간 정도 지난 후에 말로만 들어오던 변산반도의 광활한 새만금 간척지가 눈앞에 펼쳐졌다. 그러나, 여기에서 목적지까지는 한참 들어가야했다.
"야! 바다다!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드디어 바다에 온 것이다. 오른편으로 바다가 신나게 달리고 있었다. 바다라는 단어가 주는 느낌만으로 탄성이 나올 법한데 그 바다를 바로 옆에 끼고 달린다는 사실에 모든 고민도 스러질 듯했다.

잔디회가 바다로 온 것은 작년 안면도에 이어 두 번째다. 처음에는 남이섬, 새터 등 서울 인근에서 1박 2일 정도의 코스로 진행되었지만 5회 때부터는 단양, 춘천, 안면도 등으로 거리도 멀어졌고 일정도 2박 3일로 늘어 명실상부한 캠프로 성장했다.

잔디회 여름캠프 본부인 도천국민학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5시가 넘었다. 무려 6시간이 넘는 고된 여행이었다. 미리 와있던 선발대가 반갑게 맞아주었다. 선발대들은 전날에 도착해서 모기떼와 싸워가며 회원들이 묵을 교실청소, 낡은 화장실 보수, 샤워장 마련, 그리고 각종 프로그램준비 등 고된 일들을 도맡아 했다.
회원들과 자원봉사자들은 네 개조로 나뉘어 네 개의 교실에 여정을 풀었다. 각 조마다 조장이 남은 일정을 책임지게 되었다.

자원봉사자들은 도착해서부터 쉴 틈이 없었다. 저녁식사를 기다리며 잔디회 회원들은 피로를 달랬다. 그런데, 일찌감치부터 모기들이 극성이었다.
몸에 리페란을 뿌려도 별 무효과 였다. 필자가 포함된 조는 3조였다.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오래 전에 사랑의 징검다리에서 소개된 적이 있는 혜원이였다. 나이에 비해 어려보이는 민철이(초등학교 4학년)는 분위기가 익숙치않았는지 의기소침해 있었으나 마음을 열고 다독여주는 잔디회 자원봉사회장 김영숙씨(24.여)를 친누나처럼 잘 따랐다.

그날 밤늦게 운동장에서는 개영식이 펼쳐졌다. 폐교라고는 하지만 다행히 전기시설은 사용이 가능했다. 이후의 모든 프로그램의 진행은 캠프장 이동기 씨와 두 명의 보조원들이 맡게 되었다. 이들은 10여년전 잔디회에 자원봉사를 해왔던 이들로 어느 때보다도 조직적으로 프로그램을 진행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 개영식이 끝난 다음에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박옥순 간사의 접근권에 관한 세미나가 이어졌고 여우사냥으로 명명된 보물찾기로 첫날의 일정을 마감했다.

밤하늘의 보름달이 한층 밝아지며 밤이 깊었다. 회원과 자원봉사자들은 삼삼오오 떼를 지어 교실옆쪽의 바다가 보이는 곳으로 산책을 했다. 밤이 깊어 윤곽이 뚜렷하지 않았지만 바로 눈앞에 기묘하게 생긴 기암이 정겨웁게 앉아있었다. 그 뒤로 너른 바다에 고깃배들인지 수평선 둘레로 불빛들이 둥실 둥실 떠다녔다. 몇 사람들이 아래로 보이는 바다기슭을 거닐며 찰랑찰랑한 잔 물살을 즐기고 있었다. 회원들은 지금은 단지 바다를 바라볼 뿐이지만 언젠가 다가올 근육디스트로피 완치의 그 날을 믿고 있을 것이다.

그때 11시 반에는 빠짐없이 취침을 해야 한다는 캠프장의 통보가 있었다. 약간의 술렁임이 일었다. 이전까지의 캠프만 해도 그런 규정이 없었다. 잔디회 회원들에게 먼 여행이란 드문 일일뿐만 아니라 언제 다시 찾아올지 기약할 수 없는 일이다. 여행의 여흥을 즐기기에 단1분 1초도 아쉬운 것이다. 이러한 회원들의 특성을 간과한 캠프장들이 캠프의 규율을 강조한데서 온 가벼운 해프닝이었다. 회원들은 다음날을 기약하며 기분 좋은 잠에 빠져들었다.

본격적인 캠프의 날이 밝았다. 이른 아침부터 세면과 신변처리를 위해 자원봉사자와 회원들은 일심동체로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아침식사 전까지 회원들은 여기저기 흩어져 아침 공기를 즐기고 있었다. 일부는 아침 바다를 보러갔다. 간밤의 기암은 신기하게도 멋스러운 조그만 섬이 되어 있었다.

운동장 왼편 하늘아래 수락산이 맑게 씻은 모습으로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비만 내리면 수락산 계곡 중앙으로 빗물이 흘로 폭포를 이루는데 바람이 불면 물이 내려오면서 분수처럼 공중으로 퍼진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무래도 비가 올 것 같지는 않았다. 피서를 즐기기에 족한 날씨가 계속됐다.
둘째날 첫 프로그램으로 미니 올림픽이 벌어졌다. 운동장과 교실에 다양한 종류의 게임장이 마련되었다. 어린 회원들은 게임을 잘한 상으로 주는 색색깔의 클립을 모으는 재미에 마냥 즐거운 표정이었다.
실내 게임장으로 가보았다. 가장 인기 있는 프로그램은 퍼즐게임과 볼링게임이었다. 그밖에 주사위게임, 다트, 실내농구게임 등이 마련되어 있었다.

오후에 인근의 상록 해수욕장으로 대이동을 시작했다. 해수욕장과 본부 사이를 승합차가 여러 차례 오고가면서 회원들을 실어 날랐다. 회원들은 다음 차례를 기다리며 나무 그늘 아래 서있었다. 우리조의 민철이가 자원봉사자가 잡아준 매미를 들고 즐거워했다. 자원봉사자가 민철이한테 자상하게 설명을 해주었다. "매미가 얼마동안 땅속에 묻혀있는지 아니? 7년이란다. 그러고 얼마나 사느냐하면 단 7일뿐이야." 그 뜻을 이해하기에는 민철이는 아직 어려보였다.

승합차가 해변도로를 빠르게 질주해 갔다. 근처에 채석강이 있다고 하는데 눈에 띄지는 않는다. 상록해수욕장에 도착했을 때쯤 놀라운 소리를 들었다. "아빠, 이 해수욕장 접근권이 엉터리인걸." 뒷좌석에 타고 있던 국민학교 여자어린이 입에서 나온 말이다. 전 날밤의 접근권에 대한 세미나가 어린 아이에게 영향을 준 것이었다. 어린 시절부터의 공동체 삶에 대한 교육이 중요함을 새삼 실감한 순간이었다.
회원들은 미리 쳐놓은 차일 아래에서 모처럼 보는 바다를 즐기고 있었다. 모처럼의 기회마저도 심한 장애 때문에 즐기지 못하는 회원도 적지 않다.

작년 안면도 캠프때 몸이 안 좋은데도 오래도록 바다를 즐겼던 연희(장애우대학 5기.94년 소천) 생각이 스쳐갔다.
"작년에 주재옥 씨가 아이들을 데리고 해수욕장에 온 것은 14년 만에 가져온 행복이라고 했던 말에서 잘했구나 라는 보람을 느꼈다. 그런데, 두 번 다시 바다를 볼수 없는 회원을 생각하면 안타깝지. 첫 캠프때 참석한 회원이 17명 정도인데 그 중 절반 가량은 이미 세상을 떴지." 정철영 부회장님의 말씀이다.

잔디회의 탁월한 자원봉사자 김영남씨(28)와 장치성씨(32)는 소문이 나있는 장난꾸러기들이다. 이들에게 걸리면 그 누구도 예외없이 물속에 쳐박히는 신세를 면할수 없다. 몸바쳐(?) 잔디회 회원들을 즐겁게 해주기 위한 노력이 가상하다. 아마도 이런 모습들 때문에 잔디회 자원봉사회원들에게 인기가 높은 모양이다. 제법 용기있는 회원들은 미리부터 자청해서 고무보트에 올라타고서 바다를 만끽하고 있었다.

잔디회 이덕근씨(28)는 올해도 수영에 도전했다. 이제 자기는 늙어서 올해를 마지막으로 수영계에서 은퇴하겠다고 너스레를 떤다.

정철영 부회장님께 잔디회 캠프의 역사에 대해 여쭤보았다.
"85년 4월에 회원 150명을 확보하고 잔디회를 창립한지 얼마 안 되서 당시 고려병원에 입원해 있던 회원들과 부모님을 자주 만났었다. 전체 분위기가 실제로 한번 모여보자는 것으로 의견이 모아졌고, 그래서 광릉으로 야유회(제1회 캠프)를 가게되었다.

같은 환우들이 얼마나 되는지, 장애정도는 어떤지, 장거리 여행은 가능한지 등 여러 가지의 정보를 그때 얻을수 있었고 가능하다는 느낌이 와서 전부터 꿈꾸어 오던 캠프를 실행하기로 했다. 85년에 이미 50명을 넘은 상태였기에 큰 문제는 없었다. 회원들의 적응 능력을 키우기 위해 당일코스에서 1박 2일, 2박 3일로 장소도 차츰 멀리 잡았다.

잔디회캠프는 여행자체만으로도 의의가 있겠으나 그보다도 마음을 열어 준다는데 큰 의의가 있다. 마음을 열어야 사회에 통합 될 수 있고 그래야 재활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잔디회 회원들은 대개 폐쇄적인 환경 속에서 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과 부대낄 기회가 거의 없다. 캠프장소를 산이 아닌 바닷가로 정하는 것도 개방된 공간에서 많은 사람들 속에 참여하는 경험을 심어주기 위해서이다"

잔디회 팀 뒤편으로 김요씨가 이끄는 좋은 이웃(시각장애우 봉사단체)팀이 도착했다. 김요씨도 잔디회 자원봉사자로 활동한 바 있어서 잔디회 회원들과도 친분이 깊은 처지이다.
필자도 감흥에 못이겨 바다에 뛰어들기(?)로 결심했다. 튼튼한 고무보트에 누웠다. 선그라스를 꼈는데도 눈물이 날 정도로 태양이 강렬했다. 자원봉사자 여럿이 보트를 밀어 주었다. 등밑으로 깔려드는 바닷물이 별로 싫지는 않았다. 여기저기서 회원들의 환호성이 터져나왔다.

그날 밤 운동장에서는 잔디회 노래자랑이 벌어졌다. 각 조가 배출한 숨겨진 재간꾼들이 저마다 목청을 드높였다. 반주는 최첨단 시대에 발맞추어 컴퓨터가 맡았다. 최신곡을 멋들어지게 불러제끼는 순간만은 우리 회원들은 그 누구보다도 멋진 신세대였다. 자기팀 가수를 위한 응원전도 볼만했다. 3조는 여름캠프 최고의 꼬맹이 민철이를 내세우며 조원 모두가 무대로 뛰어나갔다.

민철이는 거침없이 지구수비대와 김건모의 잘못된 만남을 불러제꼈다. 여기저기서 환호성과 함께 폭소가 터져 나왔다. 잔디회 노래 자랑 우승은 "일어나" 부른 장경철군(17세)이 차지했다. "일어나, 일어나, 봄의 새싹들처럼..."이라는 가사가 마치 잔디회 회원들에게 보내는 메시지처럼 들렸다. 문득 이 노래를 잔디회 주제가로 삼아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참 운동장의 열기가 고조되던 시간에 정철영 부회장님은 교실에서 회원들을 개별적으로 불러 건강관리와 물리요법에 대해 조언을 해주고 부모님들과 상담을 하고 있었다. 이 부분도 잔디회 캠프의 중요한 요소이다.

노래자랑 다음으로 캠프파이어가 이어졌다. 장작에 불잉 붙었다. 그와 동시에 여기저기서 폭죽이 터졌다. 촛불의식으로 모든 프로그램을 마쳤다. 마지막 밤에는 통행금지(?)가 없었다. 회원과 자원봉사자들은 마냥 아쉬웠던지 운동장 중앙에서 서로 스스럼없이 어우러져 밤을 지새 찬송가를 합창하고 있었다.

"전화통화만 하던 회원들을 직접 만나보니 좋았어요. 이번 캠프를 통해서 많은 것을 얻으려 했고 실제로 이루어져서 기뻐요. 여자회원들만이라도 제힘으로 업고 싶었어요. 이번에 안전하게 업는 법을 알았고 휄체어도 능숙하게 다룰수 있게 되었어요. 아직도 힘들긴 하나 이젠 자신있어요" 잔디회 자원봉사회원인 윤혜성씨(24.여)는 당차게 말했다.

모든 일정을 마치고 떠나기 위해 관광버스가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을 때 이리에 사는 40대 중반 남자가 차를 몰고 자녀를 맡기기 위해 찾아왔다. 자신도 교통사고로 척추 장애를 입었는데 아내가 근육디스트로피 장애를 가진 자녀를 버리고 가출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두자녀 일봉이(17세), 새봉(15세)이가 의탁할 곳을 찾아 전국을 수소문한 끝에 마침 잔디회 캠프가 격포에서 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온 것이었다. 정철영 부회장은 우리회원들이 다시는 이런 일 때문에 나를 울리게 해주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말을 하며 울먹여 모든이를 눈시울 젖게했다. (지금 현재 두 형제는 서울의 김복자 회원이 데리고 있다)

이번 캠프의 총지휘자인 김한미 간사(25세)는 지쳐 보이는 모습으로 이번 캠프를 이렇게 정리했다.
"자원봉사자들이 많은 수고를 해주셨고 같이 동행해주신 어머님들께서 더위를 무릅쓰고 100명이 훨씬 넘는 참가자들의 매끼 식사를 준비해 주셔서 무사히 끝난 것 같습니다. 회원들도 별탈 없이 잘 적응해 주어서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물론 힘은 들었지만 보람을 느낍니다. 단지 장애우 캠프는 특성상 변수가 많은데 이번 캠프에서도 많은 프로그램을 마련했으나 현지사정으로 본래 목적으로 진행하지 못했습니다. 회원들에게 고립된 생활에서 벗어나 자유로움과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어 주려했으나 흡족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내년에는 그동안 참석하지 못한 회원들이 함께 해주었으면 합니다. 특히 여성회원들의 참여가 극히 부진한 편입니다. 그리고, 캠프기간 동안 사귀었던 자원봉사자들과 회원들간의 개인 친분이 오래도록 지속되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작성자이현준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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