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의 미성 안드레아 보첼리 > 대학생 기자단


세기의 미성 안드레아 보첼리

음악에의 양지와 시각장애의 음지

본문

1958년 9월 22일 오전 5시 10분 아이가 태어났다. 몸무게 3.6킬로그램. 엄마와 아빠에게는 새로운 즐거움이었다. 생후 15일쯤 지났을 때 아이는 웃었고, 9개월만에 첫 걸음마를 뗐으며, 6개월만에 첫 이가 났다. 부모는 안드레아 보첼리의 육아수첩에 이렇게 기록했다.

보첼리는 이탈리아 토스칸의 포도나무와 올리브 나무숲으로 둘러싸인 시골마을  라자티코의 가정농장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아이는 태어난 지 몇 달 안 되어 눈에 이상이 생기기 시작했다. 선천성 녹내장이었다. 이는 조만간 닥쳐올 총체적인 시각장애를 예견하고 있었다. 부모는 여러 의사들을 찾아다녔다. 병원에 머문 몇 주 동안 안드레아의 시력을 얼마간이나마 회복시키려는 몇 가지 시도를 했지만 회복되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완전치 않았지만 아직 한쪽 눈만은 시력의 근거를 남겨 두고 있었다.

유년시절부터 음악은 보첼리에게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토록 우렁차게 울어대다가도 음악을 들려주는 것만으로도 이내 조용해지곤 했다. 특히 보첼리와 노래는 떼어놓을 수 없는 존재였다. 주위의 친척들은 그의 재능에 커다란 기대를 갖고 있었다. 특히  위대한 성악가 벤야미노 질리의 추종자였던 아저씨는 그에 대해 극성이었다. 아저씨는 카루소를 비롯해 마리오 델 모나코, 쥬세페 디스테파노 등 전설적인 성악가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안드레아는 그들에게 흠뻑 빠졌다. 특히 프랑코 코렐리는 보첼리가 본받고 싶은 영웅이었다.

1965년 3월 보첼리의 부모는 극장도시로 유명한 아름답고 작은 도시 레지오 에밀라의 우수한 시각장애 학교에 입학시켰다. 보첼리의 목소리는 학교에서 인정받기 시작했고 성가대에서 독창자가 되었다. 10세 때는 선생님, 부모, 지방 당국자들을 포함한 2백명의 청중 앞에서 ‘오 솔레미오’를 불러 열광적인 박수갈채를 받았다. 이후  그는 가는 곳마다 노래 요청을 받아야 했다.

11세 되던 해 여름방학을 끝나고 안드레아는 학교에서 본격적인 음악레슨을 받기 시작했다. 멜로디를 조합하는 방법을 배웠고 플륫을 배우기 시작했다. 매일 밤 침대로 그것들을 가져와서 밤이 새도록 공부했다. 안드레아는 이미 교회에서 오르간 연주를 하고 있었다.

보첼리의 주관심사는 음악이었지만 운동도 좋아하는 활력있는 소년이었다. 어려서부터 트랙터나 나무 위에 올라가는 것을 즐겨 어머니의 애를 먹이곤 했던 그는 지금도 말을 여섯 필이나 갖고 있고 이따금 말을 타고 해변을 달리는 것을  즐긴다. 그러나 이런 기질이 불행을 불렀다.

12세가 되던 해 보첼리는 여름방학을 바다에서 보냈다. 그는 시각장애가 있었음에도 시소, 링, 공중그네 따위의 놀이기구를 즐겼고 수영을 배웠다. 지는 것을 싫어했던 그는 아이들과 경쟁했고 지기라도 하면 굴욕감으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여름이 끝나고도 그는 스포츠 따위의 신체 활동에 열광했다. 그의 시력은 아직까지는 한쪽  눈만으로 아지랑이 같은 자욱함 속에서 빛과 색을 해독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보첼리는 친구들과 축구에서 골키퍼를 맡고 있었는데 골대로 날아온 공이 그만 눈을 때렸고 뇌에 심한 출혈을 일으켰다. 출혈은 진정되었지만 가뜩이나 시야가 좁아지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빛은 서서히 사라지고 어둠만이 남게 되었다.

 변호사를 버리고 성악가의 길을 선택, 그리고 성공

이 사건으로 보첼리는 성악가의 꿈을 접어두고 현실적인 자립에 대비하기 위해 공부에 전념했다. 그는 피사대학에 진학해 법학을 전공했다. 86년에 법학 박사학위를 받고 한동안 변호사로 일했다. 그러나 그는 음악에의 꿈을 거둘 수는 없었다. 그는 줄곧 피사의 피아노바에서 연주를 즐겼다. 프랑크 시나트라, 아즈나부르, 에디뜨 피아프의 고전적인 명곡들이 주 토리였다. 이따금, 성악에 대한 참을 수 없는 열정을 좋아하는 아리아의 연주로 달랬다.

10대 때 그는 무수한 노래 경연에서 우승했지만 성인이 되면서 음악에 바친 젊은 이상은 세상사의 의심과 현실의 벽에 상처입어야 했다.
30세 되던 1990년 유년시절의 우상 프랑코 코렐리가 토리노에서 마스터 클래스를 개최했다. 소수의 인원밖에 수강할 수 없는 클래스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어려운 시험을 세 번이나 통과해야 했다. 까다로운 코렐리는 보첼리에게서 토스카나 출신의 여러 전설적인 테너의 목소리를 연상케 하는 자연적이고 아름다운 음성을 발견해 내고는 제자로 받아들였다. 피사의 법정에서 다시는 젊은 법률가를 볼 수 없었다.

안드레아는 낮에는 음악 공부를 하고 밤에는 피아노바와 클럽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며 노래를 했다. 이는 엄청난 모험이었지만 마치 필연인 듯 안드레아에게는 행운이 찾아왔다. 그 첫 번째 행운은 클럽의 손님이었던 엔리케와의 만남이었다. 엔리케와는 91년 결혼을 해서 슬하에 아모스와 마테오, 두 아들을 두고 있다.

1992년은 역사적인 한 해였다. 해가 저물 무렵 무명가수 보첼리에게 운명의 기회가 찾아왔다. 세계적인 록가수 주케로가 신곡 ‘미제레레’를 함께 부를 테너를 공모하기 위해 오디션을 열었다. 주케로는 안드레아의 음성을  듣는 순간 다른 테너들이 갖고  있지 못한 영혼의 울림이라며 감탄했다. 주케로는 보첼리의 음성을 담은 데모 테이프를 파바로티에게 들려 주었고, 파바로티마저도 안드레아의 목소리에 감탄해마지 않았다. ‘미제레레’는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고 후에 ‘파바로티와 친구들’ 앨범에 수록되어 국내에서도 인기를 끌었다.

그로부터 보첼리의 행로는 거칠 것이 없었다. 94년 산레모 가요제  기성부문에서 우승해 성가를 높였고, 2집 ‘보첼리(Bocelli)’, 3집 ‘아리아(Aria)’, 4집 ‘로만차’에 이르기까지 판매지역마다 무수한 플래티넘(2백만장 판매)을 기록하고 있고 대표곡인 ‘연이어’는 이탈리아에서 더블 플래티넘, 벨기에와 독일, 네덜란드에서  플래티넘을 기록했고 최고의 히트작 ‘Con te Partiro(안녕이라고 말할 시간(Time To Say Goodbye))’는 벨기에에서 12주 동안  1위, 독일에서 14주 동안 1위를 기록했다. 보첼리는 사라 브라이트만, 셀린 디온 등 불세출의 여성 뮤지션들과의 협연을 포함, 단 하루도 제대로 쉬지 못하는 일정을 소화해 내고 있다. 안드레아 보첼리는 한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비행기와 호텔에서 주로 삽니다. 집 주소는 생각도 안 나네요”라고 피곤한 듯 말했다.

보첼리는 이제 아내와 두 아들에게로 돌아가고 싶은 모양이다.  안드레아 보첼리는 과연 세계 최고의 테너인가?
5월 17일 수원국제음악제에서 정명훈의 지휘로 안드레아 보첼리와 조수미의 협연이 이루어졌다. 98년 내한 계획이 취소되었기 때문에 첫 내한 공연이었다. 팬들은 그의 히트곡을 기대했지만 벨칸토 창법의 아리아만을 불렀다. 보첼리는 자신을 팝가수로 바라보는 것을 싫어한다. 그래서 그는 지금껏 경음악 콘서트를 한 번도 갖지 않았다.

안드레아 보첼리의 로만차가 세계적인 히트를 하자 굴지의 음반레이블들은 빅3(파바로티, 도밍고, 카레라스)의 확실한 대안이라고 흥분했다. 그러나 그의 인기가 어떠하던간에 비평가들의 평은 차디차다. 꼭 1년 전인 지난해 5월 뉴스위크지에는 ‘Night at the Popera’라는 제목으로 보첼리를 다루었다. Popera(Pop + Opera)라는 제목에서 느껴지듯이 그의 음악은 오페라와 팝의 믹서라는 비아냥이 섞여있다. 오페라 평론가들은 그간 보첼리를 아리아도  잘 부르는 팝가수, 마이크용 가수, 보첼리의 성공은 마케팅의 승리일 뿐이라고 폄하해왔다. 그 이유로 그의 노래 패턴이 비슷하다는 점을 든다. 네 번째 앨범 ‘소뇨(Sogno)’에 이르기까지 통속적인 클라이맥스를 거쳐 감상적인 피날레로 마치는 모양이 꼭 같아 대여섯  번 듣고 나면 질리게 된다고 한다. 이는 곧 바로 다음 앨범을 사게 만드는 저속한 속임수라는 매서운 지적이다.

평론가들은 보첼리가 보기 드문 미성을 타고 났고, 그 어렵다는 하이C(높은 도보다 한 옥타브 더 높은 도)도 소화해 낸다는 것은 인정한다. 그러나 그의 곡 해석은 한계가 있다고 한다. 아무리 여러 곡을 불러도 단순하고 보편적인 수준을 넘지 못 한다는 얘기다. 게다가 보첼리는 연습이 충분치 않으며 연기동작도 어색하고 지휘자를 제대로 보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이는 보첼리의 성량이 작고  앞을 못 보는데 무대연기가 될 말이냐는 다소 편견섞인 혹평이었다.

그런 평가와는 관계없이 오페라 가수의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했고, 결국은 지난해 말 미국 디트로이트 오페라극장에서 마스네의 오페라 ‘베르테르’에서 주연급으로 출연해 꿈을 이루었다. 역사상 최초의 시각장애를 가진 오페라가수의 데뷔였다. 디트로이트 극장은 그가 감각만으로도 방향을 잃지 않고 연기할 수 있도록 무대구조를  단순하게 개조했다. 그러나 현지의‘디트로이트뉴스’는 “보첼리의 노래는 단조로웠으며 관현악 반주와 잘 맞지 않았다”고 혹평했다.

그러나 곧바로 거센 항의가 쏟아졌다.“보첼리를 파바로티의 수준에 놓고 단순비교해서는 안 되며, 그는 기대 이상의 노래를 들려주었다." 며 독자들은 열렬한 지지를 보냈다.  팬들은 보첼리가 오페라 가수이건 팝 가수이건 상관하지 않는다.  단지 우리를 감미로운 미성으로 달래주고 아름다운 음악의 세계로 이끌어주는 보첼리를 좋아할 뿐이다.

작성자이현준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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