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븐 호킹 21세기 아인슈타인 > 대학생 기자단


스티븐 호킹 21세기 아인슈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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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31일 당대 최고의 천체물리학 박사 스티븐 호킹이 제주도에서 열린 세계우주과학학술대회 참석차 방한했다. 90년에 이어 두 번째 방한이었다. 천체물리학자는 대중에게 그다지 익숙한 존재는 아니지만 스티븐 호킹은 이례적으로 대중 스타 못지 않은 인기를 얻고 있다. 아마도 아인슈타인 이래로 처음이 아닐까 싶다. 국내에서도 그의 인기는 만만치 않다.
청소년들이 존경하는 인물 조사에서 언제인가부터 그의 이름은 빠짐없이 등장하고 있고, 청소년 권장 도서에도 그의 전기는 빠지지 않고 한 자리를 차지한다. 1993년 영국에 머물 당시 그와 아파트 벽을 사이에 두고 지내며 자주 만났다고 하는 김대중 대통령도 기회만 있으면 그의 불굴의 의지를 칭송하고는 한다.

 평범했던 청년기, 갑자기 찾아든 장애가 천문학의 길 다져

 스티븐 호킹은 1942년 1월 8일 갈릴레이가 사망한 지 300년째 되는 날 옥스퍼드에서 태어났다. 호킹은 10대까지는 극히 평범하게 자라났다. 1950년 세인트 올번즈 학교에 입학한 호킹은 그다지 두드러지지 않은 보통 소년이었다. 성적이 뛰어난 학급에 소속해 성적은 중간에서 맴돌았고 글자를 깨우치는 것도 더뎠다. 단지 사물의 구조를 살피는 데 대단한 흥미를 갖고 있었다는 것이 다른 점이라면 다른 점이었다. 열대성 질병을 전공한 의사였던 아버지는 자신의 대를 이어 의학도가 되기를 원했지만 호킹은 수학을 좋아했고 물리학을 전공했다.

17세 되던 해인 1959년 옥스퍼드 대학에 장학생으로 입학했지만 여전히 천체학도로서의 특성보다는 클래식 음악과 공상과학을 좋아하는 금발을 길게 기른 낭만주의자의 특성이 두드러졌다. 그는 재기발랄한 언변과 익살스러운 유머와 위트를 구사해 교수진과 동료들을 사로잡았고 교내 조정 팀의 키잡이로 테임즈 강변의 물살을 힘차게 가르던 인기 많은 학생이기도 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호킹은 천문학을 전공할 생각은 있었지만 천문학의 관찰적인 측면에 대해서 ‘감명을 받지 못했으며’ 학부생으로서 천문학과 관련한 공부는 최소한 필요한 정도만 했다.

당시 옥스퍼드 학생들 사이에는 학업 경시 풍조가 만연해 있었고 옥스포드의 물리학 과정은 공부하지 않고도 따라갈 수 있을 만큼 아주 쉽게 짜여져 있었다. 호킹과 그의 동료들이 3년간 공부한 시간은 천 시간, 즉 하루 평균 1시간에 지나지 않았을 정도였다. 그런데 그에게 천체물리학자로서의 길을 확고히 다지게 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그 즈음 찾아든 신체장애였다. 대학 3학년 때 급작스런 신체이상이 닥쳐 날이 갈수록 움직이기 힘들어졌다. 검사결과 근위축성 측색 경화증이라는 진단이 나왔다.

루게릭병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 이 질환은 전신으로 급격히 영향을 미쳐 운동신경을 차례차례 파괴시켜 발병 2-3년 내에 사망에 이르게 하는 치명적인 질환이지만 호킹의 경우는 불행 중 다행으로 전형적인 증상에서 벗어나 있었다. 척추와 골수, 대뇌 피질이 급격히 퇴행해 점차 전신마비의 상태로 진행했지만 목숨은 건질 수 있었다.

 잇달은 블랙홀 이론 발표 제2의 아인슈타인 명성

 발병 초창기 호킹은 몹시 낙담에 빠졌다. 박사학위를 딸 만한 시간적 여유도 없고 연구를 해봤자 아무 소용 없다는 생각으로 한동안 방황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병의 진도가 완만해졌다. 생명의 고비를 넘기고 나자 서광이 비춰오기 시작했다. 수학공부가 게을러 어렵게만 여겨졌던 일반상대성 이론이 머리에 확연히 들어오게 되자 연구열이 샘솟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연구에 대한 열정을 불러일으킨 계기는 1962년 캠브리지 대학원 입학 당시 만난 전 아내 제인과의 약혼이었다. 호킹의 장애는 점점 더 심각해지고 있었지만 제인은 개의치 않았다.

 제인은 호킹에게 새로운 삶의 목적이었고 희망이었다. 결혼하기 위해서는 직업을 가져야 했고 직업을 얻기 위해서는 학위가 필요했다. 호킹은 연구작업에 몰두하면서 자신이 연구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호킹은 킹스칼리지 특별연구원에 지원했고 1965년 7월 제인과 결혼했다.

직장과 가정 모두에서 안정을 이룬 그는 연구에 박차를 가했다. 당시 호킹의 관심사는 블랙홀의 특이점이라는 개념에 있었다. 1965년부터 70년까지 저명한 수학자이자 이론 물리학자인 로저 펜로즈를 만나 당시까지만 해도 이론에 지나지 않았던 특이점(중력이 무한대인 점으로 여기서는 시간과 공간의 질서가 무너진다)을 이론적으로 증명하기 위한 연구를 했다.

이 연구의 핵심은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 이론이 맞는다면 본래 우주에는 밀도가 무한대였던 시점이 있었을 것이고, 이 상태에서 빅뱅(우주대폭발)이 일어나 우주가 팽창하게 되었음을 이론적으로 규명하는 것이었다.

이 연구는 1970년 블랙홀의 특이점 정리로 발표되었는데 이는 기존 물리학 체계를 송두리째 흔드는 이론으로 학계에 파문을 일으켰다.
70년부터 건강이 악화되어 휠체어 생활을 하게 되었지만 호킹은 블랙홀 연구에 더욱 몰두했다. 74년 블랙홀은 온도를 지니고 있으며 뜨거운 물체처럼 열, 즉 방사선을 방출하며 증발한다는 ‘호킹방사’를 발표했다. 이 발견은 과거 50년간 물리학 역사상 위대한 업적으로 여겨졌다. 호킹의 잇달은 발견으로 블랙홀은 수학적 호기심에서 이론 천체물리학의 핵심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호킹은 이같은 업적으로 ‘새로운 아인슈타인’이라는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명성은 얻었지만 건강악화로 전처와 심각한 갈등

 스티븐 호킹은 이처럼 당대 최고의 과학자로서 명성을 쌓아왔지만 가정생활은 적지않은 갈등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 원인은 호킹의 건강악화와 관련이 있다. 최근 전처 제인 호킹(55)이 펴낸 호킹과의 25년 생활을 기록한 ‘별을 움직이는 음악’이란 회고록을 통해 그 일단을 살펴 볼 수 있다. 그녀는 ‘정상적인 생활을 할 것이라 보는 다른 이들의 기대에 적당히 맞춰줄수록, 가정생활은 더욱 비정상적으로 흘러갔다’고 폭로했다.

호킹에 대해서는 ‘전지전능한 황제이며 능수능란한 꼭두각시 조종자’였다고 칭하며 ‘그것은 매우 힘들게 만들었다. 부자연스럽고 홀로코스트 희생자 같은 육체와 더할 나위없이 유아적인 욕구를 지니고 누군가에게 몹시 바라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고 회고하고 있다. 제인 호킹은 그를 간병하면서 우울증에 빠져들었다. “아무런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를 포기할 수 없었고 떠날 수 없었다. 할 수만 있다면 불에 달궈진 석탄을 머리에 뒤집어쓰고 싶었다. 강물에 뛰어들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아이들에 대한 생각이 자제케 했다.”

85년 호킹은 심한 폐렴에 걸려 기관절개 수술(호흡을 위해 목에 구멍을 내는 수술)을 받았고 이때부터 의사소통마저 어려워져 음성합성장치를 쓰기 시작했다. 결국 제인호킹은 85년부터 현재 남편인 뮤지션 조나단 헬리어와 관계가 깊어졌다. 호킹은 묵시적으로 이들의 관계를 인정했고 전문간병인을 들였다. 스티븐 호킹은 제인과 90년 결별하고 자신을 24시간 간호했던 간병인 일레인 메이슨과 95년 재혼했다.

이 책은 여성독자들의 공감을 얻으며 히트를 치고 있지만 호킹의 측근들은 분노하고 있다. 그의 저서를 옮기는데 도움을 주었던 로라 겐트리는 그는 호킹이 급성 폐렴으로 고통받고 있을 때인 1985년 제인은 이미 헬리어 존스와 불륜에 빠져 남편의 생명유지기계의 스위치를 꺼버리려 기도했다며 소송을 제기했다.

‘스티븐 호킹’은 왜 노벨상을 받지 못하는가?


스티븐 호킹은 뉴튼, 아인슈타인의 뒤를 잇는 현대 이론 물리학의 거성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그럼에도 그는 아직까지 노벨상을 수상하지 못하고 있다. 그의 주장이 이론으로 완전히 증명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호킹 자신도 이를 시인한다. 호킹의 노벨상 수상 여부는 원시블랙홀의 확인 여부에 달려있다. 원시블랙홀은 우주 탄생 초기에 생겨난 아주 작은 블랙홀로 호킹은 이의 존재가 아직 확인되지 않는 것이 자신에겐 불행한 일이라고 말하고 있다. 99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네델란드의 제라드 토프트 교수도 호킹의 이론을 반박하고 있다. 그는 호킹이 블랙홀 주변에서 양자역학이 맞지 않는다는 주장을 하고 있으나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다며 관련 논문을 계속해서 발표하고 있다.

한편, 호킹은 97년 자신의 블랙홀 학설에 잘못이 있다고 공식 시인해 화제가 되었다. 91년 호킹은 물리학자 잔 프레스킬.톤 박사와 우주에서의 특이점의 존재 여부를 두고 논쟁을 벌였다. 호킹박사는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했고 톤 박사는 반론을 제기했다. 결국 두 사람은 나중에 틀린 사람이 1백 파운드와 패배를 시인하는 글이 새겨진 옷을 보내자고 내기를 했다. 그런데 6년이 흐른 후 텍사스 대학의 오스틴 매튜 찹튜익 박사는 확실한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킵톤 학설을 지지했고 이렇게 되자 호킹 박사는 자신의 학설이 잘못됐음을 공식 인정하고 ‘자연은 보이지 않는 특이점을 혐오한다’는 문구가 새겨진 티셔츠를 보냈다.

제2의 아인슈타인이라는 평가도 아직은 이르다는 지적이다. 지난해말 피직스 월드란 과학잡지가 일반 물리학자들을 대상으로 인류역사상 가장 위대한 과학자를 선정했다. 뉴튼과 아인슈타인이 1, 2위를 차지한 이 조사에서 스티븐 호킹이 생존 과학자로는 유일하게 16위에 선정되었는데 편집인 폴 귀네시는 의외라는 평가를 내렸다. 스티븐 호킹이 불후의 공헌을 했음이 인정되기 위해서는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호킹을 그저 그런 과학자로 보아서는 안된다. 혹자는 매스컴의 호들갑 때문에 대중들이 그를 경외의 눈길로 바라보도록 길들여졌으며 그의 명성에 장애가 한몫했다고 폄하하기도 하지만 당대 최고의 위대한 과학자란 사실은 그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다. 호킹의 머리 속에는 이론으로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있을지 아무도 모를 일이다.

 

작성자이현준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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