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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소리]"장애우의 날"에 대한 소고(小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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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우의 날"은 축제의 날은 아니다. 장애우의 현실을 바로 볼 수 있도록 장애우 복지의 냉정한 감사를 실시하는 날이고 장애우 복지의 발전을 위해 치열하게 토론하는 날이다.

 "장애우의 날" 그 날이 과연 필요한 날인가 하는 의문을 던져본다. "필요하다"고 대답할 사람도 많겠지만 "필요 없다"는 대답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장애우의 날"이 제정된 역사적 배경을 지켜본 나로서는 "장애우의 날"이 합법적인 탄생을 하지 못한 점이 우선 언짢다.
 1981년 "세계 장애자의 해"였다. "세계 장애자의 해"는 유엔에서 선포했기 때문에 유엔 가입을 꿈꾸고 있던 우리나라는 이미 가입을 한 지금보다 훨씬 더 유엔의 정책에 적극적이었다.
 적어도 "장애우의 해" 만큼은 말이다. 1981년에 "심신장애자복지법"이 제정되는 장애인복지에 대한 모든 제도가 그때 급조되었다. "장애우의 날" 역시 "세계 장애자의 날" 기념행사를 했던 날이 4월 20일이기 때문에 그저 그 날을 장애인의 날로 정한 것이다. 특별한 의미가 있어서 택일이 된 것은 아니다.
 뿐만 아니라 "장애우의 날"이라는 명칭도 고정되어 있지 않아 사람에 따라 "장애우의 날" 또는 "재활의 날"이라고 하기도 했다. 더군다나 법정기념일이 아니라서 달력에 기입이 되지 않아 일반인들은 거의 모르고 장애우 당사자나 장애우 단체들 사이에서만 "장애우의 날"이라고 하며 목소리를 높이는 날로 삼았다.
 그러다 10년이 지난 후에야 법정기념일이 되었으니 4월 20일이 "장애우의 날"로 공식 인정을 받은 것은 이제 겨우 3년 밖에 안 된다.
 
법정기념일이 된 후 달라진 것이 무엇이냐고 물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히 달라진 것이 있다. 바로 "장애우의 날"에 청와대에 초청을 받아 장애우들이 대통령을 먼발치에서나마 바라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물론 첫 회는 "장애우의 날" 표창을 받은 사람만 청와대 초청을 받았기 때문에 장애우들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고 두 번째 세 번째는 시설 장애우들이 초청되어 장애우들의 청와대 나들이가 이루어졌다.
 청와대 초청에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또 묻고 싶어질 것이다. 우스운 얘기지만 청와대 관련보도는 반드시 기사화 되기 때문에 공짜 홍보가 된다. 그러니 홍보 차원에서는 소득이 있다는 얘기다(홍보의 내용에 문제가 있긴 하지만 그것은 일단 보류해 두기로 하자).
 그리고 청와대 초청으로 대통령에게 장애우 복지에 대한 부담을 주게 되므로(소량이기는 하지만)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는 셈이다. 특히 올해는 청와대 초청이 텔레비전으로 중계가 되어 홍보 효과도 높일 수 있었고 더욱이 대통령에게 부담을 주는 데도 아주 좋은 기회였다.
 하지만 홍보를 한 방송이 서울방송이라 서울·경기 지역에 그쳤고 대통령에게 큰 부담도 주지 못했다. 그 날 대통령은 진실한 장애우들의 소리를 듣지 못했다.
 언론의 자유가 그 어느 때보다도 보장되었음직한 문민정부 시대에 왜 강한 목소리를 내지 못했을까. 보사부 장관은 "장애우의 날" 하루만이라도 즐거 우라고 했다. 대통령은 장애우를 가족처럼 대하라고 했다. "장애우의 날" 피상적인 즐거움만 잠깐 누렸을 뿐 우리는 아무것도 얻어내질 못했다. 
 "장애우의 날"은 축제의 날은 아니다. 장애우의 현실을 바로 볼 수 있도록 장애우 복지의 냉정한 감사를 실시하는 날이고 장애우 복지의 발전을 위해 치열하게 토론하는 날이다.
 그렇다고 "장애우의 날"이 장애우의 날만은 아니다. 비장애우들은 자신의 건강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깨닫고 너무나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는 만족을 소유하는 날이다. "장애우의 날"이야말로 우리 모두에게 아주 중요한 날이다.
 
따라서 일단은 "장애우의 날은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리기로 하자. 그리고 내년부터는 정말 의미 있고 멋진 날로 만들어보자. "장애우의 날" 하루만이 이라도 장애우의 복지 현실을 평가하는 날이 되게 하자.
 그것은 현 대통령이 호소하고 있는 고통의 분담 가운데 장애에 대한 고통의 분담이 어느 정도 이루어 졌는가를 진단하는 일이 될 것이다.
 단순히 청와대의 넓은 뜰에서 대통령을 만나는 것으로 장애우의 날이 장식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장애우를 가족처럼 여기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정말 장애우를 장애우로 만드는 것이다.
 얄팍한 생각일지 몰라도 정말 고통을 분담하는 대통령이 되려면 장애우의 고통부터 분담해 줘야 한다. 왜냐하면 장애우의 고통은 상대적인 것이 아니고 절대적인 것에 다름 아니니 말이다.
 내가 존경하는 대통령은 소아마비 장애를 이겨낸 루즈벨트가 아니라 케네디이다. 루즈벨트는 자신의 장애를 감추는데 급급한 이기적인 대통령이었지만 케네디는 자기 동생이 정신지체라는 것을 떳떳이 밝히면서 미국의 미래를 여는 열쇠가 장애인 복지에 달려있다고 했다. 사실 미국의 장애인 복지는 케네디 대통령 시절에 대부분 이루어졌다.
 고통의 분담으로 신한국을 건설하겠다는 김영삼 대통령에게 그런 기대를 걸어본다. 다른 사람에게는 몰라도 장애우에게 확실히(?) 존경받는 대통령이 되려면 그 프레미엄으로 전 국민에게 영원히 존경받는 대통령이 될 수 있으리라.

글/방귀희
     

작성자방귀희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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