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야- 스페인 격변기 민중과 함께 한 위대한 화가 > 대학생 기자단


고야- 스페인 격변기 민중과 함께 한 위대한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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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격변기 민중과 함께 한 위대한 화가 고야

프란시스코 호세 데 고야는 1746년 3월 30일 스페인 동북부 아라곤 지방 펜테토도스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네 살 때 가족들은 사라고사로 이주했고. 고야는 신부가 경영하는 초등학교를 다녔다.

 14세 때부터 고야는 사라고사의 화가 호세 르산 아틀리아에 들어가 원화를 복제하고 데생의 기본을 배우는 등 4년 동안 사사받았다. 고야는 18세에서 24세에 이르기까지 왕립 미술학교 장학생, 이탈리아의 파르마 왕립 미술학교 콩쿨 등에 계속해서 응시했지만 번번이 낙방을 하고 만다. 

1771년(25세) 고야는 고향 사라고사로 귀환했고 1773년 마드리드에서 궁정에서 근무하던 친구 프란시스코 파이유의 여동생 포세화 파이유와 결혼했다. 파이유는 고야의 인생 후반기에 고야를 왕궁으로 불러들이는 등 외부에서 고야를 지원했던 절친한 친구였다.

1774년 고야는 왕실 타피스트리로 자주 사용되었던 카툰이라 불리우는 디자인 장르를 창조하기 위해 왕실로부터 부름을 받았다. 이 때부터 화가로서의 명성이 시작되었는데 이미 이 때 사라고사의 화가 중 고소득자의 반열에 올라있었다. 

1776년 고야는 왕실 후원으로 지불되는 연봉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고야에게는 못 이룬 꿈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궁정화가가 되는 것이었다. 고야는 궁정화가가 되려고 여러 차례 시도했지만 항상 탈락이 되고 말았다. 1779년 6월 29일 궁정화가 안톤 멩크스가 사망하자 고야는 다시 궁정화가를 신청했지만 궁정에서는 고야 대신에 다른 화가를 선정했다. 1780년 고야는 하는 수 없이 다른 직위를 신청했고 스페인의 가장 중요한 예술 아카데미인 왕립 페르나드 아카데미 회원을 신청했고 전원일치로 추천받았다. 

이후로 화가로서의 명성이 이어지는데 1781년 마드리드에 엘 그랑데 교회가 지어지자 왕은 그곳을 장식할 사람으로 고야와 다른 7인을 선출했다. 특히 고야는 가장 거대한 제단 조각을 채색하는 권한을 얻었다. 1783년에는 귀족 사회와 처음으로 접촉하기 시작했고 고야 가족은 왕실 가족과 함께 이주했다. 고야는 왕의 가장 가까운 친구 중 한 사람이 되었고 왕실 가족과 함께 살았으며 왕자처럼 대우를 받으며 모든 것을 얻을 수 있었다.

1785년에는 왕립 페르나드 미술 아카데미 회화부장 대리에 임명되었다. 40세 때 고야는 꿈에 그리던 궁중화가에 임명되었고 말 두 필이 끄는 4륜 마차를 구입하며 마드리드의 금융계 주요 인물들과 접촉을 하는 등 명성을 구가했다.

 전성기에 찾아든 청각장애 화풍에 대전환기로 작용

 고야는 일생중 중병을 여러 차례 앓았다. 그중 첫 번째가 1777년이었고 그 다음 1792년(46세) 두 번째 찾아든 병은 좀더 중증이었다. 고야는 카디즈의 세바스찬 마르티네즈라는 친구의 집에서 여러 달 회복의 시간을 가졌다. 고야의 머리는 이명으로 고통스러웠고 신체는 균형을 상실했으며 시력을 잃었고 정신착란과 마비를 겪었다. 이렇게 앓고 난 후 다른 증세들은 회복이 되었지만 고야는 영구히 청각을 상실했다. 이 모든 일이 순식간에 발생했지만 고야가 미술 작업을 계속하는 것을 멈추게 하지는 못했다. 그 고통들은 도리어 그에게 더욱 용기를 불러일으킨 듯했다. 단지 그의 미술 세계는 많은 변화를 겪었다. 고야는 청각 장애로 인해 다른 사람들로부터 고립되었고 점점 더 환상에 빠져들었고 인류를 비판적이고 풍자적으로 그리기 시작했다.

 그는 캐리커쳐에 가까운 자유분방하고 자유로운 새 스타일을 발전시켰는데 1799년 발표한 "변덕(카프리치오)"은 어리석고 나약함을 풍자한 에칭 시리즈였다. 그의 초상화는 마치 고야 자신이 그리려는 인물을 바라보는 것처럼 드러나고 있고 특성을 통찰하게 되었다. 그의 종교적인 프레스코화들에서 그는 폭넓고 자유로운 스타일과 종교예술에서 선례가 없는 토속적 리얼리즘에 몰두했다.

 호세파 고야와의 결혼생활 중이던 1794년 고야에게 불륜이 시작됐고 아내는 그의 곁을 떠났다. 그의 마음은 이즈음 몰두하고 있던 아름다움에 대한 감정적 지지를 받기 위해 알바 공작부인에게 향하고 있었다. 공작부인은 빌라프랑카의 마르퀴스와 결혼 생활 중이었다. 고야와 공작 부인은 연인관계로 발전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러나 오늘날 그들의 관계는 여전히 미스테리로 남아 있다.

 1799년 10월 31일 고야는 스페인 예술가들이 이룰 수 있었던 가장 높은 위치인 궁정 수석 화가의 자리에 올랐다. 고야는 1800년대 초 궁정화가의 자리에 앉아있는 동안 찰스 4세 왕의 가족들을 그렸다.

 카를로스 4세 때 1807년(61세) 스페인은 나폴레옹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1808년 페르난드 7세는 즉위하자마자 4월 스페인을 떠나야했다. 5월에 마드리드 시민은 나폴레옹에 봉기, 독립전쟁을 일으켰다. 7월에 호세 1세가 스페인 왕이 되어 마드리드에 입성하자 고야는 그에게 충성 서약과 함께 그를 찬양하는 그림을 제작해야만 했다. 1811년부터 1812년까지 마드리드는 기아의 참상에 빠져들었다. 고야는 이 때의 비극의 판화로 기록했다.

 1812년 3월 스페인의 자유주의파가 새 헌법을 발표하면서 호세 1세는 마드리드에서 도망 했고 1813년 페르난드 7세가 스페인에 귀환함으로써 정치 격변은 종말을 고했다. 페르디난드 7세는 복위하자마자 고야를 궁정으로 불렀다. 그러나 고야는 전혀 들을 수 없었으며 시각장애가 심해져 있었다. 고야는 그의 가장 중요한 교회 작업, 성 안톤 아바드의 성당 "성 칼라산즈의 성 요셉"의 작업을 완성하기 위해 마드리드를 떠났다. 1828년(82세) 보르도에서 노환으로 사망하기까지 고야는 스페인 최초로 리도그래피그픽을 도입 직물 짜는 노인을 완성했고(73세) 그 유명한 검은 그림을 작업하는 등 쉼없이 열정을 불살랐다. 고야는 그가 살았던 혼돈과 변화의 시대에서 가장 강한 표상이었고 19세기 전통과 거대한 예술 운동 사이에서의 마지막 연결고리였다.

 

청각장애의 집과 검은 그림

1819년 고야는 72세였다. 청각이 상실된 지 26년이 흘렀고 그의 창작력은 종말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의 삶은 여전히 갈등으로 채워져 있었다. 그는 나폴레옹 전쟁의 격렬함과 나폴레옹 패배 후 스페인 정치의 격랑 속에 살고 있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고야는 분개했고 인류 사회의 가능성을 향한 태도가 형성되었다.

이즈음 그는 30년 친구인 레오카디에 웨이스와 함께 마드리드 외곽의 2층집으로 이주했다. 이 집은 단순한 직각형 모양이었는데 전주인이 청각장애를 갖게 된 후 "청각장애인의 집(퀸타 델소르도)"으로 명명되었다. 고야는 도시 외곽에서 레오카디아와 동거하면서 마드리드 복구기의 사회적 관습에 대한 거부감이 줄어들었다.

청각장애우의 집이 유명한 이유는 고야 최후의 가장 인상적인 작업인 검은 그림 때문이었다. 고야는 75세 되던 해인 1821년부터 이듬해까지 청각장애우의 집 1층 식당과 2층 살롱의 벽면에 총 33평방 미터에 달하는 벽화를 그렸는데 옻칠을 해 번쩍번쩍하는 벽면에 직접 유채로 그려 넣었기 때문에 검은 그림으로 통칭되고 있다.

고야는 지금까지 그려진 적이 없는 가장 강렬한 무언가(혼란스러운 이미지)로 청각장애우의 집을 장식했다.

석고가 칠해진 담에 직접 오일 작업을 한 이들 그림들은 고야의 이상하고 귀기에 찬 천재적인 외향성을 드러내고 있으며 고야의 예술가적 노력의 최정점을 묘사하고 있다. 이 그림들은 자유 혹은 변덕(카프리치오)과 결합되고 그가 초창기에 시도했던 장식적인 타피스트리의 용도를 가진 에칭작품들의 기괴한 형상을 갖고 있었다. 이 그림들은 거의 2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관객을 충격적인 침묵으로 몰아넣기에 충분한 효력을 유지하고 있다.

검은 그림에 나타난 고야의 통찰력의 어떤 부분들은 우리들이 가진 통찰력보다 더욱 깊이 마음의 어두운 심연 속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보인다. 이 중 "자신의 아이들 중 하나를 게걸스럽게 먹는 새턴(농업의 신)"은 이제껏 그려진 적 없는 가장 소름끼치는 작품이다.

이즈음 그의 삶은 클라이막스로 치달았고 고독과 절망은 가장 깊이 있는 걸작들을 창조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했다. 여러 방법으로 권력과 죽음의 미학이 허공에 피를 뿌린 것처럼 보였던 스페인의 정신을 상징화했다는 점에서 검은 그림들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예술사가들은 자신들 나름대로 검은 그림에 제목들을 채워 넣고 있지만 고야는 이들 작품들에 제목을 붙이지 않았다. 우리의 인식만으로 선입견을 갖기보다는 고야가 청각장애우의 집에서 했던 것처럼 작품들 스스로가 말하고 있는 이미지를 선택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이런 방법으로 소름끼치는 충분한 경외의 감각을 전달받을 수 있고 그 불변하는 의의는 프란시스코 데 고야의 최후의 이들 이미지들이 불러일으키고 있다.고야는 페르나드 7세가 복권해 전제 정치가 부활한 1823년 손자에게 청각장애우의 집을 상속했다.

 

작성자이현준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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