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증장애우 일상다반사(15) > 대학생 기자단


중증장애우 일상다반사(15)

언어장애라는 이름의 행운권?!

본문

 
전화벨 소리 : 띠리리리~ 띠리리리~
상대방 : 여보세요?
나 : 네.
상대방 : 여보세요?
나 : 네 말씀하세요.
상대방 : 여보세요? 어디 편찮으세요? 여보세요?
나 : 원래 목소리가 이래요. 누구세요?
(늘 있는 일이니 여기까지는 태연하다.)
상대방 : 전화가 왜이래. 여보세요?
나 : 네! 말씀하시라니까요! 누구세요?
(짜증이 나기 시작하며 목소리가 커진다.)
상대방 : 아, 할머니, 혼자 계세요? 주변에 아무도 없어요?
나 : 나 할머니 아니에요! 그리고 아무도 없으니 저한테 말씀하세요. 누구세요?
(이쯤 되면 꼭지가 돌기 시작한다. 그러나 상대방은 여전히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
상대방 : 이런, 아무도 없는가보네… 할머니, 나중에 다시 걸게요. 뚝, 띠띠띠띠~
나 : 야! 나 할머니 아니랬지! 그리고 난 사람 아니냐?
아무도 없게? 미친 XX.
(상대방이 누군지 알아내지 못한 채, 애꿎은 전화기에 욕설을 퍼붓는다.)
중학교 시절 어느 방학 때 집에 혼자 있다가 실제로 겪은 일입니다.
휴대폰이 상용화되기 전, 저는 집에 혼자 있을 때나 내게 걸려온 전화가 아니면 전화를 받는 일이 거의 없었어요. 그나마 이 일이 있은 후에는, 혼자 있어도, 다른 식구들의 특별한 언지가 있지 않으면 전화를 받지 않게 되었죠.
저는 뇌병변·언어장애 2급으로 다른 장애보다 언어장애가 심한 장애인입니다.
대부분의 뇌성마비장애인들이 언어장애를 다소 동반하지만, 제 경우 상대방이 특별히 관심을 갖고 듣지 않는 이상은 말을 알아듣기 쉽지 않아요. 그나마 얼굴을 보고 대화하면 입 모양이나 행동, 대화의 상황에 대한 짐작 등으로 저의 말을 이해하는 것이 비교적 덜 어렵습니다. 그러나 전화 통화처럼 목소리만으로 저와 대화하기란 정말 쉬운 일이 아니죠.
요즘은 각종 인터넷 메신저나 휴대폰 문자메시지 등이 일상화되어 이전보다 멀리 있는 사람들과의 의사소통이 많이 수월해졌습니다.
하지만, 가끔씩 광고 전화나 이벤트 전화가 왔을 때 상대방이 제 목소리를 알아듣지 못하고 끊을 때 가슴이 아파요. 비장애인들에게는 원하지 않는, 귀찮은 전화일지도 모르지만, 저와 같은 언어장애인에게는 그러한 정보습득 여부를 결정할 권리를 박탈당하는 것이기 때문이죠. 만약 무작위로 선택한 행운권 당첨 전화인데, 안내원이 말을 알아듣지 못해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 넘어간다면 그 억울함은 어찌해야 하나요?
함께걸음으로부터 원고청탁을 받고 제 언어장애로 인해 일어나는 일상사가 어떤 것들이 있을까 생각해봤어요. 정신지체장애와 혼동하여 지능이 낮은 사람이나 어린아이 취급을 당했던 일, 이해하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제 이야기를 끝까지 듣고는 나중에 엉뚱한 소리를 해 못 알아들었음이 들통 났던 친구의 일, 제가 한 말실수를 알아듣지 못하고 전혀 다르게 전달해 본의 아니게 위기를 모면하게 해 준 친구의 일, 다른 뇌성마비장애인 친구의 말을 전달해주려 했으나 제 말마저 알아듣지 못해 곤란에 처했던 일 등이 떠올랐죠.
또 재미있는 농담을 했는데도 알아듣지 못해 반복하는 과정에서 재미없어져 허탈해하거나 이야기하기를 포기해버린 일, 중요하지 않은 말인데 알아듣지 못해 계속되는 반복요구에 당황하던 일도 있었어요.
그리고 특수교육과에 다니는 한 친구가, 제가 술을 마시면 긴장이 풀려 말이 잘나오는 현상을 가지고 알콜 치료의 가능성에 대해 교수님께 여쭈었다가 괜찮은 치료법이긴 하나 알콜중독의 부작용이 있을 수 있다는 답변을 들었다는 웃지못할 사연도 있었구요.
이렇게 언어장애가 있는 뇌성마비장애인으로 살아가는 것은 힘든 일상이 대부분이지만, 때로는 한 번 더 되풀이하고, 한 박자 늦게 이야기함으로써 다른 이들이 가지지 못한 삶의 여유가 주어지기도 하죠.
사람들이 제게 가장 많이 하는 칭찬이 글을 잘 쓴다는 거예요.
그런데, 일반적으로 글을 잘 쓰기 위해서는 책도 많이 읽고, 여러 가지로 박학다식해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1년에 책 10권을 채 읽지 않는 저와는 거리가 멀지 않나 싶습니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이 제가 글을 잘 쓴다고 생각하는 것일까요? 전 그것을 제 언어장애에서 찾아봤어요.
상대방이 제 말을 알아듣지 못해 같은 말을 여러 번 반복하는 것은 이미 저의 일상사죠. 그런데 그렇게 반복해도 알아듣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어요. 많은 부분 제가 발음하기 어려운 단어가 있거나 긴 문장을 이야기해야 하는 경우죠. 특히나 돌려서 말하기 좋아하는 제 성격 탓으로 사람들이 제 이야기를 알아듣기란 결코 쉽지 않을 거예요. 그래서 어려서부터 같은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제가 발음하기 편하고, 적절한 표현을 찾기 위한 노력을 항상 했던 것 같아요. 그러다 보니 어휘나 문법사용이라든지 독해에 있어서 다른 사람들보다 익숙했고, 음성언어로 표현할 때 제한되었던 표현들이 글을 통해 더 자세하고 실제적으로 표현될 수 있었죠. 아마도 그 때문에 내 글이 잘 쓴 글이라는 느낌을 주는 듯해요. 그런 면에서 어쩌면 제 언어장애는 제게‘장애’인 동시에 하나의 ‘기회’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장애문제가 사회문제이기에 그 책임이 개인이 아닌 국가에 있음을 이야기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또한 비장애인 대중에게 언어장애인을 이해하고 함께하기 위한 참을성과 관심이 조금 더 필요한 것도 사실이죠. 하지만 장애는 우리에게 현실이고 일상이며 우리게 주어진 조건입니다. 그 조건을 어떻게 우리 자신과 사회를 위해 바람직하게 활용하는가 하는 것은 우리 스스로에게 달려 있습니다. 동전의 양면처럼 희망과 절망은 맞닿아 있는 것이죠.
전화 통화가 어려워 받지 못한 행운권은 이미 언어장애라는 이름으로 우리 손에 쥐어있을지도 모릅니다.
 R글쓴이의 요청에 따라 장애인으로 씁니다.
글 김주현(성공회대학교 NGO대학원 석사과정)


 

작성자김주현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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