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아직 습자지가 남았습니다” > 대학생 기자단


“선생님, 아직 습자지가 남았습니다”

[주제가 있는 이야기] 나의 사랑, 나의 선생님, 나의 제자

본문

선생님, 정말 오랜만에 선생님에게 편지를 띄웁니다.
근 5년이란 세월이 훌쩍 지나가 버렸습니다.
아직도 선생님께 처음으로 편지를 쓰던 그 때가 기억에 또렷한데 말입니다.
초등학교를 입학하여 겨우 겨우 제 이름 세 글자만을 쓸 수 있었을 때 썼던 그 편지
그것을 쓴 저도 못알아 보던 그 글씨,
그 편지를 선생님, 당신께서는 아주 큰 소리로
저에게 또박 또박 읽어 주셨습니다.

그러면서 당신께서 저한테 말씀하셨지요.
“형수야, 너는 너의 글씨를 좋아하니? 싫어하니?”
저는 물론 싫어한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당신께서는 글씨는 그 사람의 얼굴인데 너는 너의 얼굴을 싫어하는 것이고 결국 너는 네 자신을 싫어한다고 그것은 이 세상에서 제일 나쁜 짓이라고 하시면서 꾸짖으셨습니다.
그러면서 선생님께서는 하이얀 습자지 한 묶음을 내어 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하얀 습자지에 네 글씨가 좋아질 때까지 글씨 연습을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 다음부터 저는 방학 때마다 선생님께 편지를 쓸 때 습자지에 두어 번 연습을 한 뒤에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글씨를 썼습니다. 그리고 가슴을 졸이며 답장을 기다렸지요.
왜냐하면 선생님의 답장은 당신께서 빨간 색연필로 꼼꼼이 맞춤법이랑 틀린 글씨를 지적해 놓은 제 편지가 대신하였으니까요.

그리고 곱게 접은 10장의 새 습자지와 함께.
당신께서 보내주시는 습자지가 쌓여 갈수록 돌아오는 제 편지의 빨간 색깔도 줄어갔습니다.
빨간 색깔이 줄어들면 줄어들수록 저는 제 자신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뇌성마비 2급의 중증장애, 저는 그 삶의 고달픔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선생님께서는 손수 저를 업어다 집에 데려다 주시기도 하고
아프면 안고 병원으로 뛰시기도 했습니다.

그 때 저는 알았습니다.
이 세상에 우리 부모님 말고도 또 다른 누군가가 나를 사랑해 줄 수 있다는 것을...
몸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고 온 데로 벋정된다 하더라도 누군가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그 반투명한 습자지 한 장 한 장에 담긴 선생님의 사랑,
그 사랑은 지금도 저의 수첩 한켠에서 곱게 저를 지켜주고 있습니다.
이제 세상을 향해 온 몸으로 글씨를 써야 하는 지금,
그 접혀진 습자지는 저 자신에 대한 또 다른 사랑을 배우게 합니다.
1학년 때 선생님이 퇴근하시면 같이 집에 가면서 옆에 앉아 쓴 습자지를 당신께 건네주던 그 뿌듯한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가려 합니다.
저의 목발 걸음은 세상에 대하 저의 글씨입니다.
이제 더 이상 저는 제 글씨가 싫지 않습니다.
선생님께서 주신 습자지가 아직 남았기 때문입니다.

1995년 5월 어느날.     

글/ 김형수 (연세대 국어국문학과 4학년)

작성자김형수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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