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손 운동 - 아이들을 건드리지 마세요 > 지난 칼럼


작은 손 운동 - 아이들을 건드리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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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벽에 걸려 있는 마지막 달력을 보면서 이제 13개월만 지나면 21세기와 함께 세 번째 밀레니엄이라는 역사적 시대가 펼쳐지다고 생각하니 지구의 신생대(新生代 : 약 6천 5백만년 전) 이래 인류가 계통수(系統樹)에 따라 인위도태(人爲淘汰)와 자연도태를 겪으면서 진화의 진화를 거듭해온 역정(歷程)은 가히 파란만장하다 못해 장엄해 보이기까지 한다.

  다아윈의 ‘종의 기원’, 라마르크의 ‘용불용설’ 드브리스의 ‘돌연변이설’등 진화론에 의하면 인류나 동물은 교배(交配)에 의해 개체의 변이가 우생학적으로 진화되어 왔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류의 자생적 창조 능력의 위대함과 경탄(敬歎)을 망각한 채 우리들은 격렬하고도 격변하는 세기말 경련(痙攣)의 회오리 속에서 또 다른 세계를 향해 질주하고 있다. 여기서 또 다른 세계란 ‘우주의 시대’, ‘첨단의 시대’, ‘복지의 시대’라고 말하고 싶다.

  지금 우리들은 정보의 바다 속에서 전자 민주주의의 실현으로 국가주체에서 지역주체가 등장하리라는 찬반논쟁이 미국에서, 모든 에너지원에 세금을 매겨 환경과 실업의 해결이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잡겠다는 유럽국가들의 계획, 스탈린의 과오와 분리운동의 여파로 위기에 위기로 치닫고 있는 러시아, 서기 2020년까지는 세계적 경제 대국을 꿈꾸고 있는 중국, 정당정치 몰락의 조짐을 보이고 있는 일본, 영연방과 ‘왕실생존위원회’의 고민에 빠져있는 영국, 이슬람 국군전선의 헤즈볼라, 이슬람 형제단, 하마스 등의 끊임없는 이슬람 근본주의 폭풍은 멀리 인도네시아 말라카 해협까지 위협하는 등 각 나라들은 자국의 첨예한 논쟁들로 들썩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어떠한가. 논쟁다운 논쟁이 없는 것인가. 있다면 함량미달의 사회적, 윤리적 도의심의 황폐와 뿐이다.

  우리들은 2년 전 선진국가 클럽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 ‘세계 중심국가’가 되었다고 자부했다. 분명 빛과 희망이 충만한 봄이었는데 알고 보니 그것은 거품이 아니었던가. ‘한국의 부(富)는 빚으로 쌓아올린 피라미드...’였다고 외지가 지적하기도 했다.

  “그것은 가장 좋은 시절이요, 그것은 가장 나쁜 시절이다. 그것은 지혜의 시대오, 우둔의 시대다. 그것은 신뢰의 연대요, 그것은 불신의 연대다. 그것은 빛의 계절이요, 그것은 어둠의 계절이다. 희망의 봄이요, 절망의 계절이다. 우리 앞에 모든 것이 있고, 우리 앞에 아무것도 없다. 우리 모두 천국을 향하고 있고, 우리 모두 지옥을 향하고 있다.” 찰스 디킨스의 ‘두 도시의 이야기’에 나오는 대목이다.

  2백년 전 세기말 어두웠던 산업혁명 시대의 분위기를 적은 글이다. 6.25 이후 최대의 고난의 시대를 우리는 맞이하고 있다. 산업혁명 시대보다 더욱 큰 고통의 해일이 엄습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 1년 동안 금융, 노동, 기업, 공공부문의 뼈를 깎는 구조조정과 제 2건국 운동을 전개하면서 우리는 새 역사 창조에 노심초사하고 있다.

  1983년 우리 나라의 천주교에서 ‘메아 쿨파 (내 탓이오)' 운동은 지금 여기서 나에게서부터 문제점을 찾고 이를 통해 문제해결에 한 발짝 접근해야 한다는 의식운동이 있었고, 1984년 프랑스의 ‘SOS인종차별’이라는 젊은이 단체가 ‘작은 손 운동’이라는 캠페인을 벌였다. 현대인의 정치적 무관심, 삶게 급급한 냉소적 기성세대를 향한 인종차별 반대의 운동을 요원의 불꽃처럼 전개해 나갔다.

  ‘내 친구를 건드리지 마세요’라는 글자가 새겨진 배지를 파리 고교생들이 달고 거리를 누볐다. ‘98년 월드컵 우승 멤버의 절반은 유생인종이며, ‘98 준 미스월드는 흑인 미스 프랑스였다. 작은 손 운동은 젊은 세대의 연대의식과 새로운 참여를 상징하는 현대적인 액세서리가 되었던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의 사회복지계의 최대관심사는 장애우다. 사람이 태어나고 번성하고 문제에 부딪치고, 고민과 고통도 받아보고, 고난으로부터 벗어나고... 이러한 과정에 장애우도 예외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지난 3월 영국 정부는 ‘신 사회계약’을 발표하면서 50년만에 사회 복지정책을 크게 수정했다. 즉 일할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는 일을 주고 일할 능력이 모자라는 사람에게만 복지혜택을 준다는 내용 등으로 ‘일하기 위한 복지’의 개념을 구체적으로 제시한 것이다. 우리 나라는 장애우에 관한 제도권 명문이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그나마 원숙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채 십 수년밖에 안 된 그 동안의 정책과 행정에서 많은 시행착오와 문제들이 제기되었지만 그렇게 낙후된 결과로만 생각할 것은 아니었다.

  정부가 장애우의 복지정책을 효과적으로 수행하려면 훌륭한 제도가 뒷받침되어야 하겠지만 최우선적인 것은 국민의식의 개혁과 전향적인 사고의 채택이다.

  바야흐로 21세기 입구 문턱에서 시급한 장애우복지의 모티브는 흑묘(黑猫)도 쥐를 잡는데 힘써야 하고 백묘도 쥐를 잡는데 전력투구해야 한다는 논리다. 구조적인 논리, 정치적인 논쟁, 시혜적인 논리는 차후의 문제이다.

  저소득층이 대부분이며 소외계층으로 끝내 분류되어질 장애우들은 함께 일하고 함께 지내주는 이를테면 사회통합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있다.

  만일 힘의 논리나 부(富)에 의해서 영문 모르고 따르던 아이들이 모두 한 목소리로 “제발 우리들을 건드리지 마세요”라고 저항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제 장애우의 문제는 기성세대에서만 논의될 것이 아니라 함께 동참해야 할 젊은 세대들이 또 다른 작은 손 운동에 의해서 제기되어 지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그것이 가능한 것은 앞서 지적한대로 인간은 위대한 가능성을 보여준 동물이기 때문이다.


글/ 장창엽 (장애인고용촉진공단 연구개발실장)

작성자장창엽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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