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스틱 운전을 기리며, 그 기다림과 사랑의 미학 > 대학생 기자단


어머니의 스틱 운전을 기리며, 그 기다림과 사랑의 미학

[김형수의 세상보기] 어느 목발 뚜벅이의 생애 주기별(?) 이동권 투쟁기 3

본문

     
어머니, 당신들의 운전을 기억합니다

공식적으로 우리 집이 가졌던 마지막 차는 88년형 청남색 프레스토 현대 차량이다. 워낙 추억의 모델이라 웹에서 사진도 구하기가 어렵다. 오토차량도 아닌데다가 파워핸들도 아니어서, 굽은 도로를 돌거나 주차를 하려면 온 몸 근육으로 있는 힘껏 스티어링 휠을 돌려야 했다. 그러나 현대차 프레스토는 지금도 올드카로서 마니아를 몰고 다니며 가끔 말끔히 복원된 차도 만날 수는 있다.

차량 번호를 별명으로 ‘5992’라 불렀던 우리 집 차는 나의 중학교에서부터 재수 시절까지 나의 이동권과 휴식을 담당했던 그리운 ‘집사’였다. 그 집사를 주로 운전한 사람은 어머니셨다. 당시에 부산지역에서 젊은 주부가 1종 자동차 면허를 발급 받고 운전하는 것은 꽤나 드문 일이었는데, 어려운 가정형편에도 당신께서 자가운전자가 되신 것은 다름 아닌 나의 초등학교 통학 때문이었다. 더 이상 당신께 업혀 다니기 힘들어졌고 목발 짚은 모습만 봐도 승차거부를 일삼던 버스나 택시 때문에, 어머니의 운전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생업으로 운전을 하셨던 아버지께서 출근 시간 등교 외에 하굣길을 책임질 수 없다는 사실도, 매번 방과 후마다 한 두 시간씩 택시를 기다리고 병원과 집을 오고 가기 위해 자가용이 있는 친척과 지인에게 부탁하는 것도, 너무나 지치는 일이었다.

지금처럼 장애아동에 대한 아무런 지원이 없는 상황에서 (그 당시 부산에는 부산 백병원 종합병원 한 곳을 제외하고, 뇌병변 장애 아동이 물리치료나 작업 치료를 받을 수 있는 곳은 없었다.) 장애인을 위한 이동권이 전무한 상황에선 더더욱 중증장애인 자녀의 어머니들은 오너 드라이버가 될 수밖에 없었다.

30년이 지난 지금도, 장애인콜택시가 있는 현재도, 중증 지체장애인 자녀의 어머니들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온갖 거부와 차별 때문에 시설에 입소해서 사회와 배제되던 과거와 달리, 통합 교육이 형식상으로라도 완성된 작금은 장애인과 당신들의 행동반경이 더 커졌기 때문이다.

장애 등급으로 지원하는 활동보조와 최장 3시간까지 대기해야 하는 장애인콜택시는, 무거워지는 아이들의 몸과 당신들의 근골격계 질환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 그렇게 당신들께서 손목과 허리의 통증으로 잠 이루지 못하는 밤이 늘어나면, 운전 학원에서 어머님들을 만날 수 있었다. 필자가 학원을 다닐 때도 민망함을 감추지 못하며 이것저것 물어보시던 장애인 자녀를 둔 어머니들을 여러 만날 수 있었다. 지금도 등교 시간에 학교나 특수교육지원센터 주차장에서는 주로 어머니들께서 그 무거운 휠체어를 내리고 아이를 안고 교문에 들어선다.

      학교 앞 신호등이 바뀔 때마다 당신을 기다립니다

당신들께서는 장애를 가진 자녀를 위해 운전을 배웠지만, 날마다 자동차로 등하교 시키는 일은 가사노동이 분담되지 않은 상황에서는 결코 녹록치 않은 일이다. 아침에야 모두가 출근하고 학교를 가니 시간을 맞추기 쉽지만, 초등학교 하교 시간에 맞춰 매일 필자를 데리러 오는 일은 집안 대소사를 과감히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뜻했다.

철들기 시작한 고학년 무렵부터는 그래서 내가 어머니 차를 기다리는 시간이 많아졌다. 처음에는 수위 아저씨에게 부탁해서 같이 점심도 먹고, 수위실에서 놀다가 지루해지면 수위실 앞 의자에 앉아 지나가는 학교 친구들과 선생님들과 인사도 하고 수다도 떨었다. (감사합니다. 1982년~85년 동래초등학교에 근무하셨던 이또범 아저씨. 20년이 지난 지금도 그 분의 성함과 얼굴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무거운 보조기를 차고 목발을 짚은 나는 그 크던 운동장과 학교 밖 세상을 코앞에 두고도 엄마 차가 올라오는 길이 보이는 벤치 앞을 벗어나지는 못했다.

그렇게 기다림의 시간은 중학교와 고등학교까지 길고 길었다. 초등학교 때는 아예 담임선생님과 함께 퇴근 시간에 집에 돌아갈 정도였다. 익숙한 차번호와 엔진소리에 아득한 반가움과 그리움을 가지게 된 계기는 그 길고 긴 기다림의 훈련 덕분이었다.

이동권을 위한 품앗이, 목발로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지침서

그러나 프레스토 집사가 고장이 나거나 더 급한 일이 있는 날이면, 선생님 차를 어렵사리 얻어 타고 가기도 하고 친구 부모님 차에 얼굴 들이밀며 타기도 했기 때문에 교내의 거의 모든 차를 시승해 볼 지경이었다.

그때만 해도 차(車) 동냥에 따른 차(車) 인심이 꽤나 후한 편이었다. 이런 동(動)-테 얻어 타기는 홀홀단신 목(木)발과 함께 한 서울 유학 시절에 본격화되었다. 동(洞)과 동(洞)이 바뀌고 산을 하나 넘어야 기숙사에 당도할 수 있는 캠퍼스는 기숙사 산고개에서 전날 태워준 사람이 기다렸다 태워갈 만큼 드넓은 것이었고, 나의 목발은 자연스레 카풀의 상징이 되었다. 그것은 뻗정거리며 걸어가는 장애인의 힘든 이동권에 대한 애틋한 공감이었고 연대라고 필자는 기억한다.

나를 태워준 사람들은 비좁은 봉고차에 땀내음과 함께 한 농구선수들이었고, 밤을 지새우는 4학년들의 가난한 오토바이였으며, 버거운 등록금과 생업에 치이는 논문과 A4지 가득 실은 연식 오래된 경차들이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나의 청춘의 바다를 만들어 준 것은 대학 강의실이 아니라, 아무런 거부감 없이 나를 태워준 이름 모를 당신들이었고 당신들의 애마였을지도 모른다.

길을 나서라, 그리하면 이루어질 것이다

생전 처음 홀로 집을 떠나 서울 생활을 시작해야 했을 때, 솔직히 나는 내심 두려웠다.
아는 사람 하나 없이, 친척 하나 없이 고향 부산을 떠나 한다는 사실 자체가 너무 생경한 데다가, 가세마저 기울어 사랑스런 ‘5992 집사’도 폐차하고 입학금만 달랑 들고 온 것이었다.

1995년 2월 스산한 이슬비가 오는 서울역은 나를 그렇게 잔뜩 주눅 들게 했는데, 대학교로 가기 위해 승차한 택시와 택시 기사 아저씨가 모든 것을 바꿨다. 한눈에 보기에도 겁먹은 시골 청년으로 보였는지, 내게 이것저것 물어보는 것이었다. 그러시더니 대뜸, “젊은데 뭐가 걱정이냐? 여하튼 여기까지 왔으니 넌 이미 용기가 있는 것이다. 걱정일랑 일단 저지르고 출발해 보고 해도 늦지 않아. 잘하겠구만.” 이렇게 격려해 주시는 게 아닌가?

20년 살면서 안쓰러워하고 쯧쯧 걱정하는 것은 많이 듣고 자랐지만, 그냥 보통 청년 대하듯 툭툭 등 떠밀려 격려해 준 사람은 그 아저씨가 내 생애 처음이었다. 길 위에 사람들, 길손을 이동하게 하는 동-테를 굴리는 그 분은 방황하던 그 청춘의 엔진에 점화 플러그가 되어 주신 것이다.

필자가 운전 학원에 등록하던 첫 날에도 (함께걸음 7월호 참조) 15년 전과 같은 막연한 두려움과 직면하고 일상의 차별로부터 도피하려고 했지만, 그 순간에도 그 택시 기사 분의 말씀이 떠올랐다. 시동도 걸어보지 않고 운전을 포기하지 말라는 그 가르침이 동시에 이제야 오롯하다. 대학에 붙고 나서 어머니께서 내게 아무거리낌 없이 운전면허를 따라고 권유했으나 내 스스로 장애를 핑계로 포기했음을.

드라이빙 Mr.Kim, 출항 모비딕!

7월부터 연재하는 자동차 운전에 관한 필자의 글에, 어떤 분들은 아직도 심각한 장애인의 이동권 문제를 가볍게 다룬다고 따끔하게 질책해주신 분들이 많이 계셨다. 동시에 많은 질문도 해주셨다. 자동차에 대해 단순히 소모품이고 이동 수단으로 생각해도 되지 않으냐고 의구심을 나타내신 독자도 계셨다. 사실 모두 맞는 말이고 필자도 동의한다.

그러나 우리가 안락하고 편리한 장애인셔틀버스보다는 출퇴근 시간에 저상버스를 확충하는 것을 더욱 강력하게 요구하는 것처럼, 세상에 사람이 사람을 만나는 굴러가는 모든 것들은 위의 나의 경험처럼 사회적인 동시에 문화이며, 그래서 종국은 정치적이다.

내 운전은 그래서 과거 이름 모를 운전자에게 받는 차 동냥과 차 인심, 곧 애정에 대한 ‘품앗이’이고자 한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어깨 밑을 쓸려가며 목발을 짚고서 기나긴 등하굣길을 걸어왔기에 동승하기를 미안해하는 걷기에 지친 비장애인을 외면할 수 없는 것이요, 고속도로에서 나에게 덤비기만 하는 고속버스와 덤프에도 불구하고 매일같이 사랑하는 사람을 데리러 가는 것은, 12년 동안 단 한 번의 결석도 없이 나를 등하교하게 했던 내 부모님, 당신들에 대한 자기 일깨움이다. 비싼 기름값과 양발 운전의 극도의 피곤함에도 차량이 없는 단체나 장애인에게 이따금씩 김 기사를 자청하는 것은, 목발 뚜벅이의 서러움과 고통을 잊지 않기 위함이다. 뒷자리를 개방해서 짐을 많이 실을 수 있는 해치백 모델의 자동차를 선택한 것도, 용달차 부를 돈이 없어 며칠이고 배낭으로 짐을 옮겼던 내 청춘의 가난함을 반드시 기억하고자 위함이다.

또 다른 내 안의 차별, 일상의 차별을 찾아서

차를 산 지 두 달 만에 주행거리 5000km를 훌쩍 넘었다. 이렇게 운전에 약간 익숙해지니 건방진(?)꿈이 생겼다. 전문 드라이빙 레이서 자격을 얻어서 사하라 사막을 횡단하는 파리·다카르 랠리에 참여해 보는 것이 하나이고, 또 하나는 미국의 양다리로 파일럿 자격증을 딴 제시카 콕스처럼 헬기 조종사 자격을 얻는 것이다.

20대 활동이 독립을 위한 활동이었고, 30대는 길 위의 인권을 위해 살아가고, 40대는 말 그대로 ‘대륙횡단’을 꿈꾸며 하늘을 날며 3차원의 장애인 인권을 고민해 보는 것은 어떨까? 장애인은 번지 점프에서도 거부당하고 백안시되는 등 일반 레저도 꿈꾸기 어렵지만, 내 안에 내 스스로 포기함으로써 이런 차별과 거부를 정당화해 주지는 말자. 원래 내 안의 적과 싸우기 가장 어려운 법이니까.

소설 백경에서 모비딕을 잡기 위해 자신의 욕심과 한계를 직시해야 했던 에이하브 선장이 그랬던 것처럼.

참 독자들은 알고 있었는가, 그 선장이 흰수염고래 모비딕에게 한 쪽 다리를 잃게 되었던 장애인이었다는 사실을.
 
작성자김형수 (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 사무국장)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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