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는 우리에게 자부심을 주는가? > 대학생 기자단


‘장애’는 우리에게 자부심을 주는가?

[김형수의 세상보기] 어느 목발 뚜벅이의 생애 주기별(?) 이동권 투쟁기 5

본문

「김 교수님이 새로운 학설을 발표했다. 소리에도 뼈가 있다는 것이었다.(중략)한 학기 내내 그는 모든 수업 시간마다 침묵하는 무서운 고집을 보여주었다.(중략) 그의 견해는 너무 난해하여 곧 묵살되었다. 그러나 어쨌든 그 다음 학기부터 우리들의 귀는 모든 소리들을 훨씬 더 잘 듣게 되었다. 」 ( 1984. 기형도 시집 [입속의 검은 잎] 중에서 소리의 뼈.)

장애에 대한 자부심의 깃발을 올려라
(Pride! Disability·Enjoy! Disability·Power! Disability)

‘문화’는 타일러(Tylor, 1871. 1. 1)가 정의하듯 한 사회 내의 집단이 공유하는 생활양식의 총체(a whole way of life)로써 지식·신앙·예술·도덕·법·관습, 그리고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의 인간에 의하여 획득된 능력과 습성을 포함하는 복합적인 전체라고 하였다. 뒤집어 말하면 어느 특정한 집단의 능력과 습성, 즉 그 존재성을 구별할 수 있고 인식할 수 있는 ‘실천’ 및 ‘행위’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장애인의 문화 행위와 문화 실천이 ‘문화’ 그 자체로 인정받을 수 있으려면, 먼저 ‘장애(Disability)’ 자체가 문화적으로 가치 있어야 한다. ‘장애(Disability)’가 문화적으로 가치를 지닌다면 ‘장애인’ 역시 문화적으로 그 가치를 인정할 수 있을 것이고, 문화적으로 가치를 지닌 ‘장애(Disability)’ 상태의 사람들이 생산하고 누리고 즐기는 문화 역시 사회적인 힘과 영향을 지닌 문명으로서의 ‘장애인 문화’라고 이름 붙일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그들이 가지고 있는 문화적 정체성이 그들에게 자부심을 배양하고 그 배양된 자부심이 그들 삶의 힘과 에너지로 나타날 때, 우리 사회는 그것을 그들이 소유하고 있으며 그들이 아닌 다른 사람이 충분히 배우고 익혀서 동화될 가치까지 있을 만한 ‘문화’라고 이야기한다. (과거, 페미니즘 문화, 인디언 문화 등-인디언과 여성들은 한때 문화적으로 그 가치가 크게 인정받지 못했음을 기억하라.)

 

   
 

핵심은 ‘장애’가 과학적으로 사회적으로 가치 있음을 검증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장애’ 자체가 가치 있음을 믿고 신념으로 확인해야 우리들에게 그 가치가 부여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 사회는 이 ‘문화’라는 낱말을 어떤 주제에 대하여 더 깊이 들어가거나 더 확대되어야 할 논의를 막아버리는 도구로 악용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서 정치나 경제의 현안에 대한 토론회에서 보듯이 해당 분야에서의 지식이나 방법이 해석상의 한계점에 부딪치면 ‘문화’의 탓으로 돌림으로써 모두들 편안한 마음으로 서둘러 논쟁을 끝맺는다. 따라서 ‘문화’는 과학·제도·기술을 넘어서는 고도의 어떤 체계가 되기도 하고 그러한 것으로 설명될 수 없는 괴상하고 신비스러운 골칫거리가 되기도 한다.

왜냐하면 논의를 막는 도구로서의 문화는 장애인 개인이나 집단의 개별성으로 도드라지는 문화가 아니라, 장애인들이 비장애인들의 주류 문화에 용해되어 자신들의 장애를 ‘극복’하거나, 불굴의 의지로 인간 승리를 하거나, 가능하다면 적극적으로 감추어야 하는 것으로 ‘장애’를 사회화시키는 중요한 기제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군가산점 문제 논쟁에 있어 군대 문화의 예에서처럼- 함께걸음 9월호 필자 글 참조.)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화’가 끊임없이 중요한 주제로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정치의 이용가치 때문인지도 모른다.

장애인들에게 정치가들과 복지전문가들은 장애인들이 다른 사람과 구별되며 그러한 구분은 내재한 문화적 특성의 반영이라고 강조하며, 정책이나 하나의 프로그램으로서 장애인 문화를 내세우는데 이때 ‘문화’는 정치적인 동시에 서비스적인 유용성을 부여받는다.

장애인의 문화 정책은 ‘장애’가 만드는 고유의 문화를 창달하기보다는 비장애인들이 일상적으로 누리는 문화로의 동화와 동등성의 방향으로 가고 있다. 실무적으로는 이 단계를 지나가고서야 ‘장애’가 만들어 내는 문화 창조의 단계로 갈 수 있을 것이지만, 서비스와 체험을 말하는 문화는 언제나 상대적 우월성과 박탈감을 만든다는 점에서 한계이다. 물론 문화가 ‘고통’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공감과 즐거움, 그 문화로의 욕구를 만들어 낸다는 점에서 장애체험 역시 많은 문화적 논쟁이 가능하다.

듣지 못하는 것을 청각 손실이 아닌 침묵을 인지하고 만들 수 있는 능력으로 볼 수 있다면, 수화를 단지 언어 장애를 보조하는 것이 아닌 온전한 농아인의 수화로 인정할 수 있다면, 우리와 우리 사회가 청각장애인을 바라보는 관점과 가치는 어떻게 변화하고 변화해 갈 것인가?

자신의 장애가 사회적으로 열등함의 표상이고 개인적으로 콤플렉스로 작용하며, 장애인이란 이름 자체가 그 이름을 듣는 누군가를 욕보이거나 화나게 하거나 피해의식이 생기게 하거나, 말하는 사람이 상대방보다 우월감을 얻어야 할 때 쓰는 비속어·비하어로써 힘을 갖고 있다면, 장애인 문화·문화 실천도 누군가에게 배워서 따라하고 싶은 주류 문화로 에너지를 갖는 것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문화의 존립은 그 존재를 온전하고 독립적인 주체로 인정할 때 가능하다. 우리가 장애인의 사회 활동에 있어 자원 봉사자에서 활동보조인이란 단어로 넘어오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필요했는지 기억해보자.

봉사와 사랑, 배려 등은 도덕적 윤리적 가치 체계이지, 장애인들의 인권과 주체성을 보장하는 실무적인 방법론이 아니다. 장애인을 사랑하자고 외치는 것은 이미 장애인은 사랑 받을 존재가 아님을 외치는 것이다.

사례로 장애인 대학생들에게는 여전히 활동보조인이 아니라 활동보조 및 학습 ‘도우미’가 제공되고 있기 때문에, 교과부의 눈물겨운 노력에도 불구하고 도우미 제도가 항상 비판대에 오르고 있는 것이다. 동등하고 평등한 관계에서는 각자의 매력과 매너와 능력으로 사랑 받고 인정 받는 것이니까. 문제는 장애인에게 그가 가지고 있는 장애에 매력과 매너와 능력을 가질 기회를 주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할인쿠폰 장애인 마크를 불태우고 싶다

반대로 장애인과 그의 장애가 뭔가 멋있고 강력하고 폼나는 것으로 표상된다면(피터팬의 후크선장처럼), 장애가 손해나 패배로 작용하지 않는다면(미국 드리마의 명탐정 뭉크처럼), 그런 문화실천과 행위로 문화를 생산할 수 있다면, 장애인의 문화 그 자체가 장애인의 정체성을 바로 세워주고 그들에게 자부심의 권능을 심어주고 그들의 삶에 긍정적인 에너지로 발산하게 될 것이다(미국 애니메이션 드래곤 길들이기의 소년 주인공과 투슬리스 용처럼). 자신의 장애가 인생의 멍에나 고통이 아니라 뛰어난 문화 콘텐츠 아이콘으로 변환시킨다면, 장애인의 장애를 기적과 구원의 대상이 아닌 향유하고 즐겨야 할 예술로 만들어 낼 수 있다면 비장애인으로 하여금 그 문화를 닮게 할 수 있다면 장애인 문화는 그 자체로 가치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농아인의 수화(手語)가 대학에서 수화 동아리의 수화 공연의 프로그램이 아니라 ‘언어’로서 정식 과목으로 개설되고 수화학회가 결성되며, 수화 통역사까지 배출되어 고임금의 전문직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면, 농아인대학생들이 대학 강의에서 UN총회에서처럼 수화동시통역을 받을 수 있다면, 수화 자체가 작금의 한글 디자인처럼 언어로서의 아름다움을 인정받아 디자인으로서의 가치를 가진다면, 농아인대학생들이 자신들의 보청기를 굳이 감추고 수화를 감추기 위해 구화를 배우려 할 것인가?

건청인의 노래를 수화로 변환한 것이 아니라 농아인들이 수화로 만든 침묵의 노래를 유명한 걸그룹이 소리 노래로 변환해 부르는 것이 유행한다면 농아인들의 사회적·문화적·정치적 지위는 어떻게 될까? 사람들이 휠체어 농구를 보기 위해 새벽부터 줄을 서고, 휠체어 농구팀 선수들이 김연아 선수처럼 인기를 누리며 무한 도전에 나오고 크리스마스 씰에 나올 수 있다면, 장애인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태도는 과연 변화할 수 있을까?

언제 어디서든 공연장과 극장을 가고 장애인들이 경기장을 가서 경기를 제대로 관람할 수 있는 있는 권리가 중요한 것은, 그 문화적 권리가 마치 우리가 학교를 가서 한글을 배워 사람들을 만나고 사회생활을 영위하는 것처럼 사람들과의 의사소통과 관계를 맺는 아주 필수불가결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시대에 따라 문명 발전에 따라 다양하고 다르게 진행된다. (1990년대 대학생들에게는 없었던 커피 문화가 2000년대 대학들에겐 필수 문화가 되었듯이)

기존의 문화에 접근이 충분히 가능해야만 그 경험을 기반으로 새로운 자신만의 문화를 창달할 수 있으며, 그 창달된 문화가 다른 문화를 주도할 때, 장애인 문화는 진정으로 장애인들의 문화라고 명명될 것이다.

젊은이들이 모여 있는 홍익대 주변은 전 세계 대부분의 스타벅스와 같은 다국적 커피전문점과 베니건스 같은 글로벌 프랜차이즈 레스토랑이 밀집해 있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철저하게 장애인차별금지법을 준수하는 스타벅스 지점이 홍대에는 3곳이나 있지만 휠체어사용 장애인의 출입이 자유로운 매장은 한 곳도 없다. 백 번 양보해서 가져가기 서비스(Take Out)를 이용할 수 있는 호출 서비스를 제공하거나 장애인이 들고 가기 편한 컵을 제공하는 곳도 없다.

어렵사리 발견한 휠체어사용 장애인 출입이 가능한 다국적 커피숍들도 내부가 좁거나 접수대가 높아 주문하기가 어렵고, 휠체어 장애인 고객들이 커피를 마시며 노트북 업무를 할 수 있는 테이블은 기대조차 불가능하다.

한국의 디지털 유목민 기질 때문에 다른 나라와는 다르게 10년 동안 폭발적으로 매장을 늘려온 스타벅스도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스타벅스는 장애인 바리스타 교육과 고용에 호응했다는 이유로 좋은 이미지를 쌓고 있다. 그들이 당연히 지켜야 할 법을 지키지 않고 있는데! 장애인들은 디지털 유목민에서도, 커피 전문점의 토론문화에서도, 고급 레스토랑의 사회적 경험에서도 배제되는 것이다.

누군가가 제공하는 여행과 관람과 공연은 그 당사자의 자유 결정과 자유의지와 선택의 권리를 침해한다는 측면에서 문제가 있다. (누군가 제공했던 공연을 장애인 당사자가 재미가 없다는 이유로 마음 편하게 중간에 자리를 떨치고 일어날 수 있을까?)

농아인 패션 모델이 각종 케이블 TV에 콘테스트 프로그램에 수화통역사를 요구하고 대동하고 활동해도 카메라가 자연스럽게 그들을 비추고 따라갈 수 있을 때, 휠체어 사용 장애인 코미디언이나 MC가 장애인이란 이유로 이슈가 되지 않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자질과 개별적인 특징 (미국 애니메이션 ‘UP'의 주인공의 목발 격투 장면과 엔딩 장면)의 독특한 장르를 만들어 갈 수 있는 장애인 문화 정책이 만들어 질 때, 장애인 문화는 문화로 그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각종 공연의 장애인 할인은 뿌리칠 수 없는 유혹이지만 근본적으로 중요한 문제는 그 공연장에 장애인들이 ‘오디션’을 보러 가는 것이 더 중요할 것이고 그 공연장에 주인공으로서 공연을 하는 것이 더 중요할 것이다.

모든 문화 현장에 장애인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으로 패러다임이 변하는 것은 비장애인의 건강함을 확인하는 ‘장애체험’이 아니라 ‘장애인 생활현장 체험’으로 변화하는 바와 같은 관점의 변화이다. 문화는 배려가 아니라 ‘투자’로 발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장애인 문화 참여에 대한 사업가들의 지원은 그래서 과도한 부담이 될 수 없다. 문화란 아무 이유 없이 투자하는 것 아니더냐? 영화 해운대의 특수효과를 위해 높은 비용을 지불하는 것에 대해 우리는 어느 누구도 과도한 부담이라고 하지 않는다. 그 특수효과에 돈을 들인 영화는 누구나 볼 수 있는 문화꺼리이기 때문이다.

장애인 문화가 장애인들만, 장애인들끼리만 즐기고 누리고 이해하는 것들이라면, 장애인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이해하고 싶은 욕구를 견인하지 못한다면, 과연 그것이 문화로서 의미가 있는 것인가?

작성자김형수 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 사무국장  cowalk100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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