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장애’체험이 아니라 장애인‘생활현장체험’이다 > 대학생 기자단


이제 ‘장애’체험이 아니라 장애인‘생활현장체험’이다

[김형수의 세상보기] 어느 목발 뚜벅이의 생애 주기별(?) 이동권 투쟁기 6

본문

“두 아이가 굴뚝 청소를 한다. 한 아이는 얼굴이 새까맣게 되어 내려왔고 또 한 아이는 멀쩡한 얼굴로 내려왔다. 누가 얼굴을 씻을 것인가. 학생들은 더러운 아이라고 답한다. 선생은 아니라고 말한다. 얼굴이 멀쩡한 아이는 더러운 아이의 얼굴을 보고 자기 얼굴을 보고 자기 얼굴에도 그을음이 묻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노릇 아닌가. 선생은 다시 묻는다. 누가 얼굴을 닦았을까. 그러나 학생들은 이번에도 정답을 맞히지 못했다. 선생은 말한다. 두 아이가 똑같이 굴뚝을 청소하고서 한 아이만 얼굴이 깨끗하다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중략)그는 칠판 위에서 "뫼비우스의 띠"라고 썼다”.
(조세희, (1976) 「뫼비우스의 띠」 -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

    ▲ ⓒ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 분노하거나 또는 행동하거나 그리고 차별 받거나

한 개인이나 집단을 다르게 대우함으로써, 심리적·사회적 불이익을 주는 ‘차별’(差別, discrimination)은 자의적(恣意的)인 동시에 사회적이며 역사적이다. 그래서 차별은 하나의 ‘문화’적인 행동양식이기도 하다.

그러한 차별의 문화 행동 양식에 반응하는 장애인을 이해하고 공감하고 변화를 추구하거나 실천에 공명하는 다른 사람들의 태도를 우리는 ‘인권감수성’ 또는 ‘장애감수성’이라고 일컫기도 한다.

학교에서 현장에서 인권감수성과 장애감수성을 키우기 위해 하는 가장 일반적인 교육 방법 및 콘텐츠 중 하나가 장애체험일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들 어떤 사람들에 대한 편견과 차별은 그들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장애인에 대하여 많이 알면 알수록, 경험하면 할수록 편견과 차별은 없을 것이며, 장애인에 대한 인식이 개선되고 이해의 폭이 넓어지면 장애인의 인권도 훨씬 신장될 것이라 말한다.

물론 그러한 주장은 타당하고 효과도 크다. 허나 한편으로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의문점도 남는다.

예를 들면 여성이나 외국인 및 북한 이주자의 인식과 이해가 증진되면서, 그들의 인권이 본질적으로 개선되고 있는가?

우리 스스로 장애란 ‘사회가 만드는 환경적이며 사회적인 것’이라고 하면서 장애인 당사자의 육체적인 장애와 고통에 집중된 장애 체험만을 쉬이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왜? ‘장애인 체험’이 아니라 ‘장애 체험’인가? 궁극적으로 장애 자체가 과연 체험될 수 있는 것인가? 장애인의 소수성이 장애 때문에 생기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경험해 보는 것이라면 다른 소수자의 정체성, 여성이나 동성애도 체험 가능해야 하고 그런 프로그램을 시행해야 하지 않을까?

장애와 비장애를 선택할 수 있는 체험의 여유로움

본질적으로 장애가 체험될 수 있는 성질의 대상이라면, ‘비장애’ 역시 상대적 경험 주체인 장애인에게 체험 가능한 것이어야 한다. 그런데 장애인은 비장애인으로 환원될 수 없고, 비장애인은 장애 상태로 장기간 체험하려 하지 않는다.

체험은 그 주체들이 언제 어떻게 체험을 할 것인가? 그만둘 것인가? 라는 것을 선택할 수 있는 성질이기 때문에, 장애를 체험한다고 말하는 것은 언제든지 ‘비장애’상태로 복귀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장애 체험의 순수한 인권교육의 가치에도 불구하고 목발을 짚고 휠체어를 타고 흰 지팡이를 짚고서 하루 동안 또는 몇 시간 장애 체험을 한다고 장애인들이 일상적으로 당하는 차별과 모욕을 체험할 수 있는지에 장애인 당사자들은 의문을 제기한다.

장애인의 장애는 개인의 자의적 선택이 아니라 타의에 의해 구조적으로 규정당하는 것이기 때문에, 깊은 고민 없이 시행하는 장애 체험 프로그램은 장애를 단순히 육체적인 결손과 고통으로 강조함으로써 오히려 비장애를 건강함과 다행으로 생각한다라는 역효과의 결과를 낳기도 한다.

 
   
▲ ⓒ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

차별의 직접적인 모습은 그 대상에게 스스로 차별 받는 존재임을 드러내라고 강요받는 것 그 자체일 수도 있다. 그런데 장애 체험을 통해서 비장애인들이 비장애의 육체를 부모에게 감사하고 자신의 건강함을 확인하는 순간, 그것을 바라보는 같은 공간의 장애인에게는 일종의 강제적인 ‘아웃팅’이며 동의되지 않은 정서적인 폭력일 수도 있다. 우리는 여성 문제를 알고자 여성을 체험한다고 말하지 않으며 여성성을 체험한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함부로 여성을 체험할 수 있다고 말하지 않는 이유는 상대적으로 이미 평등한 존재임을 생각하고 또는 그렇게 생각해야 한다고 ‘의지’와 ‘신념’을 발휘하기 때문일 것이다.

장애 체험 역시 그런 의지와 신념을 교육하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장애 체험은 일상의 장애인에게는 늘 민망하고 거북스러운 것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장애인의 문제와 차별을 인식하기 위한 지금의 비장애인들이 하는 장애 체험 프로그램이 어느 정도 교육적으로 유용하다 할지라도 언제든 정상적인 상태, 즉 비장애적인 상태로 회귀한다는 것을 언제나 약속하고 돌아갈 수 있는, 장애 극복과 인간 승리라는 장애가 주는 고통과 차별을 개인적으로 극복하지 못하면 ‘장애인=루저’, ‘장애는 고통’이라는 도식을 만들어 낼 위험이 있다.

장애가 의학적으로는 고통일 수 있지만 사회적으로는 자신이 선택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은 당사자의 다양성이자 개별성일 뿐이다. 그러한 당사자의 신체적·정신적 다양성과 개별성을 우리 사회 환경이 적절하게 지원해 주지 못하기 때문에 장애인이 장애 상태와 차별에 놓인 것이고, 그런 상호작용 속에서 사람들은 편견과 선입견을 교육 받지 않는가? 오히려 장애가 그토록 힘든 것이라면, ‘장애’가 차별이 되지 않고 고통이 되지 않은 무장애 사회 무장애 공간을 장애인에게 경험시키는 것이 더욱 장애이해와 인식개선, 인권에 더욱 부합하지 않는가?

비장애인이 ‘쉽게’ 접근하는 장애 체험들은 대중적으로는 사회적으로 정상임을 확인받고 그 정상적임과 건강함을 감사해 하는, 상대적으로 능력 있고 건강하다고 느끼는 비장애인들의 집단적인 여유로움으로만 다가올 위험도 있다. 그 여유로움이 장애 체험을 가능하게 하는 동기가 되는 것은 아닐까?

    ▲ ⓒ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 장애 체험에 알아야 할 몇 가지 것들

소수자에 대한 교육에서 장애인 교육은 1990년 초의 장애인식개선 교육에서 2000년 초의 ‘장애이해교육’ 그리고 이제 ‘장애인인권교육’ 또는 그냥 ‘인권교육’으로 이름 짓고 있다. 이러한 이름은 비장애가 장애보다 우월하거나 건강해서 그들을 배려해서 ‘장애’를 이해한다는 관점에서부터, 점차 장애와 비장애는 상대적이며 동등하고 개별적인 상호작용적인 것이라는 관점으로의 변화를 의미하기도 한다.

비장애인들이 일상적으로 걷는 것, 걷기 자체는 큰 어려움으로 인식하지 않는 것처럼, 목발로 걸음마를 배우고 일상에서 늘 목발을 사용하는 사람은 목발 짚는 것에 익숙하기 때문에 목발을 사용하는 것 자체는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목발 사용자가 사회생활에서 가장 곤란을 겪는 문제는 목발 보행의 장애물과 목발을 잡은 손 때문에 자유롭지 못한 점이다. 휠체어 사용자가 휠체어를 운전하는 것에 힘들다기보다, 휠체어로 인해 낮아지는 시선과 휠체어가 접근할 수 없는 편의시설일 것이다. 시각 장애 체험은 안 보이는 것에 대한 공포가 힘든 것이 아니라, 음성 정보의 부족이나 잘못된 점자 정보, 식당 등에서의 안내견 거부 등일 것이다. 농아인은 수화 통역이 없거나 시각정보가 충분하지 않을 때, 자막도 수화 통역도 없는 9시 뉴스를 매일 보는 답답함일 것이다. 무엇보다 깊이 경험해 보아야 할 지적·자폐성 장애나 정신 장애를 체험 프로그램으로 생산해내기 난해하다는 점이 장애 인권교육 콘텐츠로서의 장애 체험의 한계성일 것이다.

핵심은 장애가 야기하는 1차적인 신체의 고통으로 인한 곤란함은 일시적인 장애를 겪는 비장애인의 입장이므로 장애인 감수성을 반영하는 데 제약이 발생한다는 점이다.

신체적·정신적 장애에 이어 그것을 둘러싼 사회 환경과의 상호 작용으로 발생하는 2, 3차 ‘장애’와 차별을 체험할 수 있는 상황과 현장, 그리고 과업이 중요하다. 예를 들면 목발을 사용하면서 자판기 커피를 뽑아 손에 든 채로 왁스칠을 한 복도에서 마음에 드는 후배와 목발로 선 자세로 수다를 떠는 과제가 더 효과 좋은 체험일 것이다.

장애 체험이 대규모로 체육관에서 모여 시행하는 기아 체험과 성격이 다른 점이다. 장애인 당사자의 입장과 감수성을 적극 반영한 장애 체험은 이렇듯 사회와 사람들과의 상호 작용이 중요하다. 우리 모두가 알고 있지 않은가? 제일 많은 내공이 필요한 것이 사람들의 ‘시선’이라는 것을. 사람들의 쳐다봄과 훑어봄을 느낄 수 있는 장애 체험이 요구되는 것이다.

그래서 궁극적으로 장애 체험 프로그램은 한 두 시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가능하면 1박2일이라도 보다 긴 시간 동안 일상과 사회생활을 해보는 장애인 생활 현장 체험으로 보다 세밀하고 깊이 있게 발전해야 할 것이다.

장애 체험을 시행하고자 하는 사회복지사나 특수교사가 먼저 단 하루라도 온 종일 휠체어에 앉아, 시각 장애를 안고 업무나 생활을 해보는 과정이 중요할 것이다. 장애에 대한 인식을 개선하고 이해하고 인권을 함께 하려면 충분한 지식 이외에도 실천하고 행동할 수 있게 하는 공감, 입장의 동일함도 필요할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나는 비장애 체험을 소원하는 것이다. 진정 목발을 짚지 않는 비장애인과 공감하고 싶기에.
작성자김형수 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 사무국장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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