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 ‘재정 위기’ 이유로 수어·자막 예산 중단 통보… 장애인권리위원회 활동 위기
“접근성은 선택이 아니다” 유엔 장애 차별에 국제 장애계 반발 확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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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이 재정 위기를 이유로 국제수어 통역과 실시간 자막 제공 등 필수적인 접근성 서비스를 중단하겠다고 통보하면서, 유엔장애인권리위원회(Committee on the Rights of Persons with Disabilities, 이하 위원회)의 정상적인 활동이 심각한 위기에 처했다. 이에 대해 위원회는 물론, 한국과 국제 장애인단체들까지 나서 강한 우려와 규탄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2026년은 유엔장애인권리협약(CRPD)이 유엔 총회에서 채택된 지 20주년이 되는 해다. 협약은 현재 193개국이 비준한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은 국가가 참여한 국제인권조약이다. 그러나 협약 이행을 감시하는 유엔 기구 자체가 접근성 부재로 기능을 멈출 위기에 놓이며, 유엔의 장애인권 책임이 근본적으로 시험대에 올랐다.
유엔 “재정 문제” 통보… 제34차 위원회 세션 개최 불투명
위원회가 1월 31일 발표한 성명에 따르면, 1월 22일 유엔 총회·회의관리국(DGACM)은 비정규 예산(non-post funding)을 승인할 수 없으며, 유엔의 재정 상황이 개선되기 전까지 관련 예산이 제공되지 않을 것이라고 통보했다. 이에 따라 제네바 유엔사무소 회의관리부는 국제수어 통역과 실시간 자막 제공 등 위원회 활동에 필수적인 접근성 서비스가 제공되지 않을 수 있다고 밝혔다.
그 결과, 3월 9일부터 27일까지 제네바에서 예정된 제34차 유엔장애인권리위원회 세션은 접근성 보장 없이 개최될 수 없는 상황에 놓였다. 해당 세션에서는 5개국의 최초 국가보고서 심의와 함께 개인진정 사건, 조사 요청, 일반논평 채택 등 위원회의 핵심 기능 수행이 예정돼 있었다.
위원회는 이러한 상황을 “다른 유엔 인권조약기구와 비교해 명백히 불리한 처우”라고 지적하며, 합리적 편의 제공의 거부에 따른 차별에 해당한다고 분명히 했다.
농인 위원에 대한 합리적 편의 거부… “명백한 차별”
성명은 또한, 2025년 1월부터 임기를 시작한 농인 위원에 대한 합리적 편의 제공이 지속적으로 거부돼 왔다는 점을 문제 삼았다. 해당 위원은 최소 2인의 수어 통역 지원을 반복적으로 요청했으나, 사무총장 권한 하의 유엔 관련 부서들은 이를 이행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해당 위원은 공식적인 유엔 지원이 아닌 제3자의 도움에 의존해 위원회 활동을 수행해야 했으며, 위원회는 이를 “200명 이상의 다른 유엔 인권 메커니즘 전문가들과 비교해 명백한 차별”이라고 규정했다. 이는 장애인권리협약이 금지하는 차별에 해당한다는 점도 분명히 했다.
김미연 위원장 “우리는 침묵하지도, 후퇴하지도 않는다”
김미연 유엔장애인권리위원회 위원장은 “유엔장애인권리협약 제정 20주년을 맞이하는 지금, 유엔의 지속적인 재정 위기로 인해 국제수어 통역과 실시간 자막 제공을 포함한 필수적인 합리적 편의가 제공되지 못하는 매우 심각한 상황에 직면해 있습니다. 그 결과, 3월 9일부터 시작될 예정인 제34차 위원회 세션이 취소될 위기에 놓였습니다.”라며 이번 사태에 대한 심각성을 알렸다.
이어 김 위원장은 이번 사태를 “전례 없는 배제와 차별의 위협”으로 규정하며, “전 세계 13억 명의 장애인들과 함께, 우리는 이 현실 앞에서 침묵하지 않을 것이며, 우리 위원회는 결코 후퇴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국제장애인연합(IDA) “접근성은 선택이 아니다”
국제 장애인단체인 International Disability Alliance(IDA) 역시 2월 2일 성명을 내고 유엔의 조치를 강하게 비판했다. IDA는 유엔의 유동성 위기가 장애인에게 불균등한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그 결과 국제수어 통역과 자막 제공 등 핵심적인 접근성 서비스가 중단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IDA는 특히 ▲국제수어 통역과 자막 제공 중단으로 농인 및 청각장애인의 위원회 접근이 차단되고 있다는 점 ▲2025년부터 국가별 수어 통역 제공이 중단되고, 각국이 원격 통역을 제공할 경우 유엔이 추가 비용을 부과하고 있다는 점 ▲농인 위원인 Hiroshi Tamon에게 유엔총회 결의 80/197이 명시적으로 요구한 수어 통역 지원이 제공되지 않고 있다는 점을 문제로 제기했다.
IDA 사무총장 José María Viera는 “현재의 상황은 결코 용납될 수 없다. 유엔장애인권리위원회의 접근성 서비스는 선택 사항이 아니라 필수 조건이며, 이것이 없으면 위원회는 기능할 수 없고 국제 인권 감시는 심각하게 약화된다”고 밝혔다.
이어 “협약 20주년을 맞은 해에 이러한 퇴행은 결코 받아들여질 수 없다”고 강조했다. IDA는 유엔 관계 부서와의 직접 협의를 통해 제34차 위원회 세션이 모든 접근성 조치를 갖춘 상태로 예정대로 개최될 것을 요구하는 한편, 협약 당사국들에도 접근성과 합리적 편의 제공이 재량이 아닌 협약상 의무임을 다시 한 번 상기시켰다.
한국장애포럼 “유엔 스스로 존재 이유 훼손”
국내 장애계 역시 즉각 반응했다. 한국장애포럼(KDF)은 2월 3일 성명을 통해, 이번 사태를 “유엔이 스스로의 존재 이유를 훼손하는 경악스러운 행위”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KDF는 접근성과 합리적 편의 제공이 결코 “부가적인 배려”가 아니라, 장애인을 차별해온 과거를 바로잡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인권 조치임을 강조하며, 유엔 헌장과 장애인권리협약의 정신을 정면으로 위배한 결정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유엔 사무총장과 관계 부서에 ▲위원회 요구사항의 즉각적인 이행 ▲재발 방지를 위한 제도 개선 ▲전 과정에 장애인 당사자와 대표단체의 참여 보장을 요구했다.
“접근성 없는 유엔은 인권을 말할 수 있는가”
유엔장애인권리위원회는 접근성과 합리적 편의가 제공되지 않을 경우, 이는 단순한 행정상의 문제가 아니라 위원회에 대한 제도적 차별이자 유엔 내 장애인 참여의 심각한 후퇴라고 경고했다.
협약 20주년을 맞은 지금, 유엔이 재정 위기를 이유로 가장 기본적인 접근성조차 포기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런 유엔이 과연 각국에 장애인권 이행을 요구할 자격이 있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 국제사회에 던져지고 있다.
작성자김영연 기자 cowalk100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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